[싱가포르] 말줄임 혹은 축약사회. by 뭉군




3주 간의 짧은 연수를 마치고 나는 싱가포르 사회를 '축약사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존재하는 모든 단어를 앞글자만 따서 축약해 버리는 싱가포르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 눈알을 휘둥그레 굴리며 붙인, 연구할 바가 무궁무진한 조어이니 싱가포르 연구자들과 언어학도들께 조속한 연구착수를 촉구하는 바이다.

이전에 잠시동안 싱가포르에 살았던 경험과 책상위에 놓여진 아이패드 덕에 수업에서 거론되는 상황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긴 했지만 십초에 한번 튀나오는 이들의 축약어들은 나를 여러번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ERP: Electronic Road Pricing]


지금은 기억도 못하는 그 수많은 축약어들 - ERP, NTUC, NCSS, ERP, JD, VWO, MOM, MOE, SCORE, ED, SMRT - 은 우리네 십대들이 무턱대고 말을 줄이며 느끼는 소속감처럼 싱가포르 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업과 같이 나름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축약어가 통용된다는 말은 이러한 말줄임 현상이 일부 계층의 은어가 아닌 사회 전반에 퍼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의미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축약어를 꼽으라면 "FOC"였다고 감히 자신있게  말하겠다.

때는 일요일이었고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그 유명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도착한 시점이었다. 친구는 호텔직원에게 주차장은 어디냐고 물었고 ("까빡 car park?") 직원은 발레파킹이 아닌 스스로 주차할 거냐고 ("셀빡self-park?")이냐고 되물었다. 셀빡임을 확인하고 지하로 내려가서 주차장 관리요원에게 주차비가 얼마냐고 묻자 우리의 요원 왈,

"FOC"라고 답하셨다.

[까빡? 쎌빡?]


의미인즉, 공짜(Free of Charge)라는 말을 줄였던 것이다. 나는 그 놀라운 축약력에 실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쯤 되면 축약의 본래 목적인 경제성도 별다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 "프리오브차지"나 "에프오씨"나 말하는데 수고스럽기는 거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얼른 편하게 말하기 위해 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무엇이든 줄이고 보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 나말고 FOC에 놀란 분이 한 분 더 계셨으니...)

사실 나는 웬만한 단어 축약에는 콧방귀도 끼지 않는 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작금의 한국사회 일부 청년들이 보이는 축약형 말하기라는 트렌드에 적극 동참하는 한편 이에 더해 나름의 새로운 축약문화를 만들기 위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입만 열면 신형 축약어를 만들어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회사에 그리고 가정에) 유행시킨 말이 마만(마포만두), 아아노(아이스아메리카노), 바정(바비큐 정식) 등 빛나는 조어 경력을 지닌 나였건만 FOC 의 창의력에는 그야말로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주로 음식, 장소 등 명사를 줄일 줄만 알던 내가 일종의 표현 (무료입니다. 공짜입니다)을 줄이는 새로운 축약세계를 접했으니 신의 한수를 배우고 온 듯한 뿌듯함이 가슴에 잔잔히 일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 어찌되었든 깊고 넓은 싱가포르의 축약문화의 원인이 무엇일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요인은 싱가포르 인들 중 70퍼센트 넘게 차지하는 중국어를 말할 수 있는 (소위 중국계라 불리우는) 이들의 존재다. 한국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면 콩글리시가 배어나듯 중국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쓰면 그 나름의 언어문화와 습관이 반영되어 싱글리시를 형성하는게 아닐까? 시간이 지나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친구를 향해 "이 자식 왜 이렇게 안와" 라고 말하는 것을 간단히 "How come no come?"이라고 표현하는 싱가포르식 영어에 뭔가 사자성어의 깊은 뜻이 배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 추측은 추측일 뿐, 이를 확인하기 위해 친한 싱가포르 친구에게 물었다. "왜 그럴까요?"
 
[심각하게 답변 중]

이에 대한 싱가포르 친구의 생각은 좀 의외였다.

"그건 말이야, 상당히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일 수 있어. 일단 말을 줄이면 단시간 내에 실용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 외에도 마케팅에 유리하거든. 생각해 봐, Singapore Corporation of Rehabilitative Enterprises 라는 무시무시한 이름보다는 SCORE라고 부르면 짧기도 하고 뭔가 범죄자들의 재사회화를 돕는데, 즉 스코어를 올리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잖아"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친구는 무시무시한 말 한마디를 흘린다.

"이봐, 싱가포르 정부는 뭘 하더라도 허투르게 그냥 하는 법이 없어. 뭐든 이유가 있지"

싱가포르 축약문화를 정부가 주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만 친구는 이 광범위한 현상에 대해 정부의 치밀한 의도를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디어와 공적인 장소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축약어가 쓰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냥 싱가포르에 잠시 스쳐가는 외국인 나그네 입장에서 이 나라에 대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긴 하지만 최근 5년 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회 변화상을 살펴보면서 나는 이 나라를 (연성이든 경성이든) 독재국가로 치부하는 것이 어찌보면 약간 섣부른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그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나왔던 신어(Newspeak)의 존재였다.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용되는 신어의 핵심은 '축약'이었다.

"이 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아이들은 인공수정(신어상으로는 인수라고 함)을 통해 태어나 공공 기관에서 양육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빅브라더가 신어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1984 소설책 부록에 나온 '신어의 원칙'은 이렇게 기술한다.

"신어의 목적은 영사를 열성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세계관과 사고 습관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기타 모든 사고방식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신어가 전적으로 수용되고 구어가 잊히게 되면 이단적 사고 - 즉, 영사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고 - 는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유를 물었던 그 싱가포르 친구는 1984를 읽어봤음에 틀림없다. 그 친구는 소설 속 주인공인 윈스턴의 직장동료였던 사임이 쓰던 말을 정확하게 흉내내고 있었다.

"윈스턴, 자네는 신어(Newspeak)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군."

"신어의 전반적인 목적은 사고의 폭을 줄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 1984 에서 사임이 윈스턴에게 던진 말


덧글

  • kc7810 2013/07/17 23:34 # 삭제 답글

    지나가다가 보고 글 남겨요.. 축약어를 쓰는 것은 싱가포르 뿐 아니고 거의 전세계 어디서나 그정도는 쓴 답니다...
  • 뭉군 2013/07/18 21:33 #

    좋은 의견이신데 별로 도움은 안되네요 ㅎㅎㅎ
  • passerby 2016/08/02 13:45 # 삭제 답글

    통찰력이 대단하세요. 싱가폴 정부는 무엇이든 허투루 하지 않는다와,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는 말. 많이 와 닿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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