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카지노 by 뭉군



지난번 우연히 들렀을 때는 미처 여권을 준비하지 못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오늘은 마음먹고 여권을 챙겼다. 해외에서의 도박은 돈을 이내 딸 것 같은 설레임이 솔솔 이는 법이라, 내 마음은 이미 잭팟 기념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오늘 대박을 내면 호텔 부페에서 아들을 호강시켜 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여러번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과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한번에 데려다 주는 버스가 있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심지어 시원한 버스 안에서 땀이 송그르르 맺혔다. 카지노 사전 조사를 통해 반바지에 슬리퍼 찍- 끌고 오면 안된다고 하길래 도박장의 위엄에 걸맞는 겨울 면바지와 구두를 착용하고 있어 그런 탓으로 돌렸다.


쇼핑몰에서 카지노를 찾기는 무척이나 쉬웠다. 입구가 곳곳에 있어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황금빛 무늬를 두른 카지노 글자만 보고 들어가면 끝이었다.

입장을 위해서는 두번의 여권 확인을 거쳐야 했다. 라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민머리 말레이시아 거형들이었다. 그래, 중국계 형들이 있으면 카지노 바운서들의 위엄 내지는 위압을 지키기 보다는 불량향이 더 강하게 풍길 것 같다. 이 역시도 예리하게 계산된 효과이지 않을까.


바운서 형들은 아주 친절했다.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아이를 들쳐 안고 있는 나에게 21세 미만은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1개월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데려가려 했으니 좀 지나친 아빠였나 보다. 그래도 좋은 경험일 텐데 말이야.

결국 우리 부부는 아이를 쇼핑몰에 풀어주고 한번씩 번갈아 가며 싱가포르 카지노를 접수하기로 했고 내가 먼저 가겠다고 나섰다 (이것이 패착요인일 줄이야) 그사이 쇼핑몰을 접수한 아들은 여느 때와 같이 원숭이 같이 쇼핑몰을 휘젓고 다니다가 또래의 인도인 꼬마를 만나 멱살을 잡히고서야 놀란 망아지처럼 서럽게 울면서 제정신을 찾았다.


가족을 쇼핑몰에 남겨둔 나는 비장한 마음에 아들의 눈물이 볼에서 마르기 전에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아내에게 받은 20달러와 여권을 꼭 움켜쥐고 바운서들을 통과했다. 여권 속 사진과 내 실물을 몇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아까 그 말레이 형은 드디어 "안닝하세요" 라고 말하며 기분 좋게 통과 사인을 내렸고 나는 눈을 낮게 깔고 비장하게 말했다. 

"땡큐"

내부는 무척이나 넓은 공연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2층에 올라서서 위를 바라보니 프라이빗 도박장인 듯 했고 아래를 바라보니 메인 도박장인 듯 했다. 어차피 카드나 주사위 도박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 보이므로 대상에서 제외했고 주로 말없는 기계 곁에서 어슬렁 거리며 분위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엉성해 보이는 도박자라고 한들 아무도 내 돈을 등쳐가진 않을테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천장에 바퀴벌레 내지는 박쥐들처럼 붙은 수천 수만 대의 씨씨티비 카메라를 보니 왠지 영화속 주인공이 된 듯 했다. 뭔가 내 움직임을 두고 카지노 헤드쿼터 시큐리티 체크 박스에서 화면을 통해 보안 관계자 서너 명이 "저 녀석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라고 주시할 것 같은 이유라고 하면 웃을려나. 머리는 안감았지만 나름 남의 돈 잘 따게 생긴 옷차림이었거든. 
 

그러나 실상은 이거 뭐 도박을 해봤어야 슬롯머신이라도 한번 당겨보지, 걸어다니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버튼 누르는 것을 흘끔흘끔 보아도 당최 어떤 원리로 돈을 따는지 알 수 없어 이내 급 후회가 밀려왔다. 아 이런거 잘 물어보는 아내를 먼저 들여보낼 걸. 시간은 얼척없이 흐르고 아들의 양쪽 볼에 맺힌 눈물들은 내 허황된 약속만 기다리다가 벌써 승천했을 것이다.

일단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치밀한 사전조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타짜들에게는 후리 드링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입수한 터, 한 잔 마시고 각성하기로 했다.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테이블 곳곳에는 얼치기 도박자들이 한숨과 함께 뱉어낸 담배연기들이 아직 타다 남은 장초들 곁에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꼭 마시다 만 테 타릭(Teh Tarik)들이 유리잔들에 식어 있었다.

[사진출처]

밀크티의 일종인 테타릭의 뜻이 당기는 차(Pulled Tea)라는 뜻이니 일확천금 한번 당겨볼 요량인 사람들에게 더없이 적합한 음료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테타릭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끝끝내 찾지 못했고 나는 그냥 1층 구석에 있는 음료 벤더에서 무한 제공하는 스프라이트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스프라이트를 스티로폼 종이컵에 가득 담아 적합한 슬롯머신을 찾으러 나섰다. 탐색전은 끝나고 이제 본 게임에 돌입해야 하는 것이다.

도박장 곳곳에는 니코틴으로 힐링 받으려는 사람들이 내뿜는 쪽박의 스멜이 전해져 왔다. 한 층은 금연이라고 들었는데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는 것인지 어딜 가나 담배 냄새는 확연히 느껴졌다.

결국 나는 한적한 기계 하나를 붙들고 자리에 앉았다. 지폐 아니면 칩만 받는다니 칩으로 바꾸고 자시고 하는 것보다는 그냥 10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고 기계는 기분좋게 내 돈을 그 자리에서 흡입했다. 자 이제 어떻게 게임 좀 해볼까 하고 스핀 버튼을 두번 눌렀더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게임 오버란다. 베팅을 너무 세게 했나? 너무 허무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지폐를 들이밀었다. 역시 기분 좋게 흡입하는 슬롯머신.

미련하게도 나는 스핀을 몇번 누르다가 또다시 게임오버 표시를 마주해야 했다. 음 다른 이상한 버튼들도 눌러줘야 하는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허무한 마음이 가득차 그냥 일어서기 아쉬워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우연히 take win 이라는 버튼을 찾아 누르니 황송하게도 내가 딴(?) 돈을 종이에 찍어 출력해 준다. 무려1달러!

쓰디쓴 스프라이트를 냉큼 들이키고는 캐셔에 가서 1달러 영수증을 금빛 찬란한 동전으로 바꿨다. 1달러를 전해주는 직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땡큐 앤 굿럭"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겼다. 스무살 경륜장에 가서 500원을 걸고 100원을 벌어 600원을 돌려받았을 때 올림픽 공원 경륜장 직원이 내게 날린 웃음과 비슷한 종류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잔챙이는 얼른 집에 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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