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모든 것의 자유에 대하여. by 뭉군



#1

1994년, 한 미국인 교수가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싱가포르를 탈출했다. 말 그대로 탈출이었다. 학교 연구실의 책과 집기를 챙길 틈도 없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의 크리스토퍼 링글(Christopher Lingle)교수가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에 싱가포르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당한 험한 꼴이었다.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총리는 링글 교수가 쓴 칼럼에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법원은 이미 미국으로 날아가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링글 교수에게 싱가포르 사법부에 대한 모욕 등을 이유로 당시 역대 최고인 7,0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을 때렸다. 


역시 같은 해인 1994년 (그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콴유의 심기가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나 보다) , 같은 대학 정치학과의 빌비어 싱(Bilveer Singh) 교수는 인도네시아 신문인 자카르타 포스트(Jakarta Post)에 “Singapore Faces Challenges of Success” 라는 칼럼을 썼다가 역시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호된 맛을 봐야 했다. 문제가 된 내용인즉, 싱가포르 인들 다수가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정부와 일부 세력이 그 과실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즉각 같은 신문에 반박문을 게재해 싱 교수에게 주장의 정확한 근거를 요구했다. 학술논문도 아닌데 수치까지 요구하니 좀 처연하긴 했다만 싱 교수는 곧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싱 교수는 싱가포르국립대에 여전히 재직 중이며 (그 사건 때문이었는지) 아직 부교수에 머물러 있다. 

일련의 소란이 소리 소문 없이 잊혀진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여전히 지식인들의 입이 두려운 모양새다. 싱가포르국립대와 최고대학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난양공대(Nanyang Technological University)는 최근 체리안 조지(Cherian George)라는 미디어 분야 교수 한 명을 테뉴어 심사에서 떨어뜨림으로써 뉴스거리를 만들었다. 물론 조지 교수는 싱가포르 정치 시스템및 여론에 대해 상당히 거리낌없이 발언하던 사람이었다. 

위의 상황들이 비단 싱가포르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백년 전 막스 베버(Max Weber)는 독일의 예를 들며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 실력 이외의 숱한 요인이 개입한다는 점을 모든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종의 리스크이자 주어진 외적 환경이라 칭하기도 했다. 

#2

오랜 세월 유지해 왔던 표현의 자유 억압에 대한 균열양상은 (늘 커다란 변화가 그랬듯이) 오히려 시민사회로부터 추동되고 있다. 그 어느때보다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자신감을 보이는 각종 시민단체들은 지난해 재보궐 선거 이후 정부가 취하는 국민과의 대화 모드 (Our Singapore Conversation이라고 부른다)를 적극 활용해 여러 이슈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싱가포르 대화 홈페이지]

대표적인 사례는 싱가포르 내 인구증가에 대한 국민들의 고조된 불만이다. 올해 초 정부는 인구백서를 발표하며 현재 500여 만명을 넘은 외국인 포함 싱가포르 인구를 2030년까지 69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고 이는 속이 꽉찬 국민들의 분노와 마주해야 했다. 시위를 위해 마련되었지만 한가하기만 했던 Honglim Park같은 공원이 성난 시민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 외국인들은 늘고 물가는 오르고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마련한 MRT같은 대중교통 수단에 외국인들과 함께 콩나물 신세가 되자 짜증을 넘어 분노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게다가 집값과 밥값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의 값어치가 가파른 속도로 폭등하고 있으니 위기는 총체적이다. 한 싱가포르 친구는 "싱가포르인들은 이제 웃음을 잃었다"라고 자신들의 상황을 처연하게 묘사했다. 제3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실제보다 과장을 섞어 묘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위기감이 심각한 수위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의 주된 관심 - HDB 엘리베이터 업그레이드 작업]

어찌보면 이러한 국민들의 분노는 정부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정부가 정치라는 행위의 범위를 기껏해야 지역의 민원(가령 싱가포르에서 주공아파트 격인 HDB의 엘레베이터를 교체해 달라는 건)을 협의하고 해결하는 정도로 협소화시킨 탓에 인구정책과 교통정책 등의 거시적인 문제를 정하는데 있어 국민의 배제가 당연시 되었고 이에 따라 공공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을 만한 장치를 두지 못한 것이다. 

싱가포르 시민사회단체로서는 호기임에 분명하다. 예전같았으면 정부가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을 일부 공공정책에 치열한 잡음이 들리고 있으니 정부는 물론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한 예로 싱가포르 외곽에 위치한 부낏 브라운(Bukit Brown)이라는 공동묘지를 두고 벌어지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대치상황이 있다. 일종의 자연생태 공원처럼 파헤쳐지지 않은 이 공동묘지가 고속도로 건설 등을 이유로 밀려버릴 위기에 처하자 시민단체들이 이곳을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정부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다. 

#3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가 선택한 해법은 '대화'다. 앞서 언급한 2012년부터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싱가포르 대화모드(Our Singapore Conversation)가 대표적이다.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 26명이 모여 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국의 타운홀 미팅처럼 각 지역을 돌며 민심을 수렴해 정책형성에 반영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지금까지 국민들이 제기한 주제는 아래와 같다고 한다. 
 
 
만여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대분류를 하자 저렇게 두루뭉술한 그리고 좀 뜬구름 잡는 주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 거대한 스케일의 대화를 통해 국민들이 정책 결정 절차에 참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채널이 마련되었다. 위기의 시대에 급히 만들어진 대안적 채널조차 정부주도로 만들어져 밑의 목소리가 위로 추어올려진다는 것은 이 '대화'의 효과성 내지는 진정성에 약간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싱가포르 정부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참고)
1. 싱가포르 학문의 자유 침해 사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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