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발끝에 탱고. by 뭉군



그곳이 평소에 남미의 파리라는 표현은 들어보았다만, 파리를 잡아보기만 하고 가본적은 없었던 나에게는 전혀 닿지 않는 표현이었다. (나의 고품격 비유에 격하게 공감하는 이들에게 파리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영화로 "2 Days in Paris"을 강력히 권한다)

나에겐 그저 부루마블에서 수십 만원을 내고서야 통과할 수 있는 비싼 곳으로만 인식되었던 (실제로 통화가치가 연일 곤두박질 중이라 실제로 정말 비싼 곳이 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제대로 인식한 것은 어느날 감상한 연주곡 때문이었다.

2011년 봄이었나, 얀 포글러와 친구들이 들려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를 듣고 몸에 흘러든 전율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온몸을 지릿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빠 따라 클래식 연주회를 자주 가봤어도 잠이 들지 않았던 순간이라면 열두 살 장영주의 바이올린 연주회 정도였던 나에겐 드문 순간이었다. 포글러는 이 악성 관객에게 악장과 악장 사이가 침묵과 헛기침의 시간만은 아니란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와 비슷한 가르침을 얻은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에 탄성을 내지르기에 바빴다. 눈앞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봄부터 겨울까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곳에서 온몸을 부비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는, 뭐랄까 (다녀온 다음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귀를 온전히 덮는 헤드폰을 머리에 얹고 노상 탱고로 유명한 플로리다 거리에서 인파를 헤치고 감상하면 좋을 음악이었다. 수십 가지의 표정을 가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는 골목길을 돌 때마다 계절이 바뀌는 탓에, 변화무쌍한 탱고가 제격이었다. 여름처럼 화려하고 시원한 무희들이 거리의 행인들을 둘러세워 자신의 발끝을 높이 세우는가 하면 겨울을 앞둔 가을의 시들함은 주체할 바 없이 곳곳의 허름한 까페들로부터 스며나온다. 연주곡 전반에 걸친 특유의 바이올린 채를 날카롭게 흐리며 발생하는 끄트머리음 조차 이 도시의 여운을 진하게 대표하고 있었다.

얀 포글러 이후 한동안 처박아 둔 기억을 다시 소환한 것은 책상 위에 떨어진 중남미 업무였다. 손닿는 순간부터 톡하고 터지더만, 급기야 출장을 준비하면서 정나미를 떨구고 부에노스고 나발이고 출장이 취소 혹은 지연되기만을 기도하다가 올라탄 비행기에서 우연히 사이드월(Sidewalls)이라는 아르헨티나 영화를 만나 문득 피아졸라가 그린 그곳의 겨울을 떠올렸다. 우리에게는 '이웃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인데, 긴 여정 동안 가수면 상태로 영혼이 기체 안을 둥둥둥 부유하면서 육체는 상하좌우로 접어가며 감상한 영화였던 터라 디테일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 몽환적인 분위기만은 뚜렷이 각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르헨티나 판 "접속"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는데, 한국영화 접속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가 크게 기여한 탓인지) 뭔가 우울하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면, 사이드월은 아주 그냥 우충충한 건물에서 피다만 러브스토리였다. 하지만 몇시간 후에 내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을 두고 미리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기 전날, 두시간 정도의 휴식이 주어졌고 무작정 호텔을 나섰다. 콜롬비아에서는 절대 나가지 말라던 일행도 여기에선 별다른 말이 없으신 걸로 봐서 치안은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이었다. 중앙역 근처에 호텔이 위치해서인지 걷기 시작한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빡빡했다. 잠시 어디로 향할까 고민하다가 인파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잠시 살피고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일터가 있는 곳이라면 가게도 있고 공원도 있을 테니까. 

재수가 좋았던 것인지 기대 이상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분위기의 펍이 몇개 보이더니 나중엔 차도를 제거한 사람들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거리의 양 날개에는 서점이 있었고 까페가 있었고 탱고 공연장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곳은 탱고 공연장이 잔뜩 들어서 있는 플로리다 거리였다. 호텔을 누가 잡아 줬는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마침 Tango's 라는 이름의 음반 가게가 눈에 띄었다. 계획한 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만 챙겨 나가려는 나를 사장님이 여유로운 말투로 붙잡는다.

"자네 이 음악 들어봤는가? 지금의 탱고 음악계에서 최고의 뮤지션이라 인정받는 사람이야"


평생 이런 패에 말려 뭘 사본 적이 없었는데 사장님이 튼 씨디가 가게를 울리고 십 초가 지나지 않아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씰룩거리는 내 귓테가 이미 몇 초 만에 사장님에게 구매의사를 내비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Fablo Hager라는 낯선 이름의 연주자였는데 외모는 꼭 케니 지처럼 생긴 사내였다. 사실 남미의 케니 지가 아닌 다른 낯선 연주자의 음악이라도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도입부터 말미까지 내내 클라이막스가 지속되는 탱고라는 음악은 절정에 이를 마음의 준비를 미처 갖추지 못한 누군가를 한 방에 매혹시키는데 더없이 적절한 장르였다.



발끝까지 탱고의 기운이 스며들어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는 신이 나서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급기야 호텔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부유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시름한 기운이 풍기는 까페에 들어가 쓴 커피를 한 잔 들이키니 그제야 각성이 된 나는 내가 숙소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급한 마음을 추스리고 퇴로를 궁리한 후 까페를 나섰다. 탱고 기운이 가득한 발끝에 힘을 주어 종종걸음으로 스스로를 재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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