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그리고 협잡의 현대사 by 뭉군



블로그에 캄보디아에 대한 글이 없다고 여긴 참에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강연을 소개받았다. 영화 킬링필드를 보고 정문태의 글을 읽었던 것이 전부였던 터라 캄보디아 역사에 대해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강연 통역을 하기로 했다. 

통역을 위해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싱가포르 탈출 직전 헌책방 투어에서 구입한 후, 언젠가 읽을 날이 있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책장 한구석에 처박혀 두었던 David Chandler의 "A history of Cambodia" 를 찾았다. 캄보디아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저자였고 프랑스 식민시대부터 크메르루즈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개괄하는데 그의 차분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이유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도대체 왜 크메르루즈 정권(공식적으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라 불리움)은 1975년 캄보디아를 접수하며 도시에 사는 국민들을 시골로 쫓아내려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챈들러는 네가지 이유를 말한다. (210쪽)


첫째, 수도 프놈펜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식량부족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둘째, 도시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관리할 역량이 크메르 루즈 정권에는 없었다. 

셋째, 크메르 루즈 일당이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탓에 사람들을 시골로 다 쫓아 버렸다. 도시엔 자신들의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분자가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넷째로 가장 확실한 이유는 주로 시골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던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 루즈 일당의 소속집단)이 자신들의 승리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랬다는 것. 

요약하자면, 크메르 루즈 일당은 농촌 출신들로, 농촌의 도시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하고 강성한 농업국가를 건설해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고 나름의 이상국가를 세워보려고 노력했던 듯 하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노예같이 일하다가 수십 수백만 명의 캄보디아 인들이 비참하게 죽어 나간 것이고.

챈들러의 책이 크메르 루즈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여러 관점으로 차분하게 묘사하는데 반해, 정문태가 기록한 "현장은 역사다"는 아시아 각지에서 그가 겪은 역사의 현장들에 대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책이다. 챈들러가 "미국이 폭탄을 몇 톤 정도 어디에 퍼부었다"라고 썼다고 하면 정문태는 "인민학살자 미국과 국제사회의 속임수가 캄보디아를 헤쳐놓았다"라는 식으로 분노한다. 챈들러는 연구실에서 분석하는 학자고 정문태는 전선을 누비는 기자이기에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차이로, 누구의 글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다만 정문태의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글이 더 읽기 쉬울 뿐. 

서슴없이 '협잡', '분탕질', '해코지' 라는 표현을 자신있게 사용하는 정문태의 글이 바탕으로 두는 것은 어떤 강력한 이론도 아니고 확실한 숫자도 아니다. 현장에서 20년간 취재하면서 얻은 나름의 통찰력을 잣대삼아 판단하는, 그가 가진 모종의 확신이 근간이다. 그가 겪은 아시아 현장의 역사와, 일반인들이 책이나 주류 언론을 통해 기억해 온 역사 사이의 괴리를 메우고자 하는 정문태만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뒤집어 보지 않는 역사는 배반"(343쪽)이라는 정문태의 말은 그가 쓴 책의 존재 이유를 그대로 드러낸다. 

 
위의 책들에 더해 크메르루즈 시대를 다룬 국문 논문 하나를 읽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킬링필드의 기억과 재현"이라는 부경환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2011)이었다. 처음엔 크메르 루즈 전후의 현대사에 쓰인 용어(지명, 인명, 정권 이름 등)들의 국문 이름을 파악하고 연대 순으로 캄보디아의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해 보기 위해 서문 부분을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 내용이 자꾸 궁금해지는 글이었다. 

부경환은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후 30년이 지난 지금, 크메르 루즈에 대한 기억들은 국가에 의해 "재구성" 및 "재생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1979년 훈센 일당이 베트남을 등에 업고 크메르 루즈 정권를 밀어내고 세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의 행위가 캄보디아 인민들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으며, 훈센을 비롯한 지도부를 "구원자"이자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동안 크메르 루즈에 관한 캄보디아 인들의 집단적 기억을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훈센에게는 자신이 무너뜨린 크메르 루즈 시절 벌어진 학살의 극악무도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그래야 구원자이자 승리자로서의 훈센 일당의 자리가 빛나는 법이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뚜얼슬렝 감옥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구미에 맞게 어떤 기억을 선택해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부경환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국가에 의해 재구성된 집단적 기억"의 역할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측정할 수 없는 데이터라며 관심을 두지 않긴 했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필리핀 이주 노동자 (Overseas Filipino Workers)들을 두고 필리핀 정부가 만들어낸 집단적 기억의 재구성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해외에 나가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돈을 벌어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는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을 의도적으로 "National Heroes"라고 묘사하고 실제로 이들에 대한 영웅화 작업이 정부에 의해 상당히 진행된 결과, 자신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국가와 결코 영웅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간의 괴리 속에서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긴 세월 필리핀 정부에 대한 분노를 쌓아왔다는 것이 나의 주장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필리핀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양산되는 존재인 반면에 크메르 루즈는 이를 기억하는 캄보디아 인이 점차 사라지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재구성한 기억의 재현은 캄보디아에서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큰 반면, 필리핀 정부는 계속 자신의 발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부경환의 글은 캄보디아 관련 논문이 많지 않은 우리 학계에서 드물고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새삼 인류학적 방법론에 대한 매력이 담뿍 느껴지는 글이었다. 참고로 부경환의 논문 일부는 "동남아시아의 박물관"이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책의 한 챕터를 이루고 있다.


강연자인 쁘렝 피셋(Preng Piseth)씨와는 강연 당일날 조금 일찍 만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한국에 머무는 캄보디아 학자를 찾다보니 강연자가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니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때 조금 개론적인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싶었고, 나중에 강연내용도 개략적인 캄보디아 역사가 주를 이뤄서 약간은 아쉬웠다. 

피셋 선생은 한국의 한 연구기관의 초청으로 국내에 머물며 크메르 루즈에 대해 연구 중이라 했다. 흠 왜 굳이 아무런 자료도 없는 한국에 와서 크메르 루즈를 연구할까 상당히 궁금했지만 더이상 묻지는 않았다. 다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길 바랄 뿐. 

밥을 먹으며 주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 딸에게 물려줄 성씨가 없다는 (아니 있어도 물려주지 않는) 캄보디아 사회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버마도 그렇고 인도네시아도 그렇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공유되는 흔한 사례이건만 들을 때마다 신기해서 여러번 캐묻게 된다. 덕분에 강연내용에 대한 사전 질문의 기회를 조금 잃었다만.

드디어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 전에 받은 발표문과는 다른 피피티가 화면에 떠 있어 약간 당황스러웠다. 발표문은 크메르 루즈 시절만을 다루고 있었는데 반해 피피티는 선사시대의 고고학적 유물부터 이야기가 나오는 통에 내 얕은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지식을 한탄하며 힘겹게 순차통역을 이어갔다.

강연 내용은 잔잔한 개론 수준이었다. 두시간 강연 중 마지막 삼십분에서야 드디어 크메르루즈 이야기가 나왔는데 최근 벌어지는 캄보디아 특별재판 이야기가 조금 언급되자 마자 시간상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 했다. 캄보디아 역사와 관련한 피셋 선생의 결론은 캄보디아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더이상 과거를 샅샅이 들춰내는 소모적인 작업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왕립학술원에 재직 중인 학자여서 그런지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나중에 객석에서 묻기를, 스페인 내전 이후 스페인 정부가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을 수행하고 있는데 반해 왜 캄보디아는 이와 달리 대충 마무리하고 지나가느냐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피셋 선생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이 세상에 완벽한 정의실현은 없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정말 따지고 들자면 킬링필드 이전에 수천 수백톤의 폭탄을 퍼부었던 미국 정부부터 재판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일정 수준에서 마무리되는게 최근 급성장세를 기록하는 캄보디아를 위해서도 낫다는 것이 요지였다. 아무래도 대학에서 세부전공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한 사람 같았다.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가 어디 있으랴!

돌아보니 강연통역을 준비하며 더 공부할 수 있었던 탓에 이 강연의 수혜자는 바로 나였다. 그게 아니었으면 영화 '킬링필드'가 남기고 간 단편적인 감동을 부여잡고 캄보디아 역사를 단순히 좋은 놈과 나쁜 놈의 격돌로만 보고 살아갈 뻔 했다. 아래는 이번 강연 발표문을 내가 번역한 글이다. (맥락없는 문장이 많아서 맥락을 만드느라 의역이 꽤나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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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 이후의 전환기적 정의


Preng Piseth

캄보디아 왕립학술원 연구원


서문

폴 폿(Pol Pot) 혹은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체제라고 알려진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체제는 20세기 최악의 학살정권이라 일컬어진다. 4년의 통치기간 동안 2백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러한 비극에 대해 누구도 국제적으로 법의 심판을 받은 바 없다. 오히려 1979년 폴 폿 체제가 무너진 이후 도망친 지도세력들과 망명정부는 중국, 미국, 아세안 등으로부터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크메르 루즈 세력들에게 정의를 묻고자 하는 지난 3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UN과 캄보디아 정부는 (크메르 루즈 재판이라고도 알려진) 캄보디아 특별재판소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ECCC)라는 혼성 재판부(hybrid tribunal)를 세우게 된다. 특별재판의 설립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의를 세우는 일임과 동시에, 범법행위를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는 기존의 문화와 단절하고 인권존중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도 특별재판이 캄보디아인 희생자들을 위로할 만큼의 수준이 되는지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 발표문은 특별재판이 캄보디아에 가져온 ‘전환기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가 캄보디아인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캄보디아 역사 일반

캄보디아 혹은 캄푸치아라고 불리우던 나라는 한때 동남아 영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강성대국이었다. 캄보디아의 황금기는 단연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졌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였으나 제국의 멸망 이후 시암(현재의 태국)과 베트남 등 이웃나라의 침략에 의해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지위는 1953년 노로돔 시하눅(Norodom Sihanouk)이 이끄는 캄보디아 정부가 독립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독립 후 17년이 지나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당시 노로돔 시하눅 국왕이 주장한 캄보디아의 중립선언이 미국을 자극해, 국왕의 해외 순방 중에 (미국이 지원한) 론 놀(Lon Nol) 일당의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미국은 캄보디아(와 베트남 접경지대)의 시골에 수백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북베트남의 승전선언을 간신히 지연시키고 있었다. 당시의 폭격세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행해진 공습에 버금가는 끔찍한 만행이었다. 쿠데타로 인해 망명자가 되어버린 시하눅 국왕의 국민들에 대한 호소와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은 캄보디아의 십대들로 하여금 정글속 게릴라 세력이 되어 론 놀 정부에 맞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더해 국왕과 크메르 루즈 간의 연합전선은 크메르 루즈 일당들의 입지 강화에 기여했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퇴각한 이후,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즈는 론 놀 정부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승리는 크메르 루즈 만을 위한 것이었다. 폴 폿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살롯 사르(Saloth Sar)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는 국민들을 주요 도시로부터 소개(疏開)하는 명령을 내렸다. 크메르 루즈가 집권하는 동안 화폐제도와 교육제도가 폐지되었고 이주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크메르 루즈는 집권 첫날부터 국민의 고혈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했고 특히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농업국가를 꿈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민심 이반, 지도세력 간 숙청, 캄보디아와 베트남 양국의 전쟁 등의 요인들로 인해 크메르 루즈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당시 크메르 루즈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아 베트남으로 망명 후 베트남 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헹 삼린(Heng Samrin), 찌아 심(Chea Sim), 훈 센(Hun Sen) 세력에 의해 1979년 1월 7일 크메르 루즈 체제는 막을 내렸고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과 추종세력들은 캄보디아와 태국의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이 승리는 캄보디아 국민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돌려준 사건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절대적 빈곤상태였으며 국가 기반시설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던 터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이라는 새로운 국명으로 출발한 캄보디아는 폐허에서 모든 것을 복구해야 하는 동시에 크메르 루즈 세력이 다시 복귀하지 못하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베트남 군대의 존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캄보디아인들을 해방시키고 크메르 루즈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둘째로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조성한 냉전 속에서 정치행위는 진실보다 우선시 되었다. 1980년대 UN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규탄하는 표결을 진행했으며, 결국 크메르 루즈 세력은 UN이 인정하는 캄보디아 정부로 등극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크메르 루즈를 몰아내고 들어선 신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고 (상황 변화를 꾀하기 위해) 1989년, 신 정부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국명을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으로 변경했으며,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1991년 10월 23일 파리협정에 의해 1993년 5월 UN 캄보디아 과도 권위체(United National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UNTAC)가 주관하는 총선이 캄보디아에서 진행되었고, 그 결과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 시하누크 국왕의 아들)와 캄보디아국의 총리였던 훈 센을 공동 총리로 한 연립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총선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1998년 정부의 화해전략에 의해 공식적으로 와해될 때까지 게릴라 활동을 지속하였다.


크메르 루즈 재판과 정의의 도래

1979년 8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는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인민혁명재판을 소집했다. 5일간 열린 이 재판에서 학살의 주범이었던 폴 폿과 이엥 사리(Ieng Sary)는 피신 중인 관계로 법정에 세우진 못했지만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당시 재판은 절차상의 문제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외교적 고립상태로 인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범죄자들에 대한 선고내용은 실현되지 못했다.

1993년 총선 이후 공동총리로 선출된 노로돔 라나리드와 훈 센은 1997년에 이르러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재판을 열 수 있도록 UN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UN은 국제 재판을 제안했지만 훈 센 총리는 국가 차원의 화해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국의 법적인 조력에 의한 국내 재판을 원했다. 2003년에 이르러 UN과 캄보디아 정부는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배합한 중간 형태의 재판을 열기로 합의하고 2005년 마침내 캄보디아 특별재판소가 설립되었다.

특별재판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의 고위급 지도자들 및 당시 행해진 범죄행위와 중대한 (국제법) 위반이 인정되는 책임자들을 기소하고자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폴 폿(1998년 사망)과 따 목(Ta Mok, 2006년 사망), 그리고 중간 및 하급 관리자들은 기소하지 못했다.

특별재판은 현재까지 두 개의 사건을 다뤄왔다. 사건번호 001은 (Tuol Sleng뚜얼 슬렝으로 알려진) 프놈펜의 S-21 보안감옥의 책임자였던 카잉 궥 이아우(Kaing Guek Eav)에게 종신형을 내리면서 완료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번호 002는 누언 찌아(Nuon Chea, 민주 캄푸치아 서열 2위), 이엥 사리(민주 캄푸치아 외무부 장관), 키우 삼판(Khieu Samphan, 민주 캄푸치아 수반), 그리고 이엥 티리트 (Ieng Thirith 민주 캄푸치아 사회부 장관)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중 세 명은 학살, 반인권 범죄, 전쟁 범죄의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캄보디아 정부는 특별재판이 그 밖의 다른 사건들에 대해 다루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결론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저지른 끔찍한 학살에 대해 국제적으로 기소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UN의 도움을 받은 캄보디아 정부의 노력은 특별재판소 설립과 크메르 루즈 일당에 대한 재판으로 이어졌다. 크메르 루즈 재판은 캄보디아 국민들을 위해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것이며 국민들이 긴 세월 동안 간절히 바라던 바를 실현시켜 줄 것이다. 크메르 루즈로부터 핍박받은 모든 이들의 아픔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재판은 또한 위법행위는 결국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캄보디아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는 다음 세대 캄보디아 지도자들에게 인권의 가치와 국가의 평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이들도 언젠가 법정에 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캄보디아의 단결과 안정은 국가적 평화와 발전을 이룩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다. 크메르 루즈 재판이 세운 정의는 캄보디아에 단결과 안정을 굳건히 하는데 다시금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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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는 여행 : 캄보디아와 한국 2012-09-16 00:24:49 #

    ... 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구미에 맞게 어떤 기억을 선택해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http://lampz.egloos.com/4709816 -> 폴포트의 만행이 현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어떤식으로 기억되고 재현되는지에 대해서 써져있다. 또한 좋은 논문과 다른 읽을거리, 캄보디아 학자의 ... more

덧글

  • 지나가다 2012/07/08 00:29 # 삭제 답글

    알찬내용 잘 읽고 갑니다.
    부경환씨의 논문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사회과학이 계량화된 수치만 다룬다는건 어떤 근거로 하시는 말씀인지를 모르겠어요.
    한 예로, 영국에서는 인류학이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말씀하신 부경환씨의 연구내용은 매우 인기있는 주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기억의 정치학, post colonialism에 관해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예요. 인류학이 수치와 계량의 학문은 아니죠. 물론 한국에서 인류학은 인문과학으로 분류되긴 합니다. '사회과학'이 아니라 '한국의 사회과학'으로 범위를 좁히셨다면 공감했을텐데요.
  • 뭉군 2012/07/10 21:53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글을 잘못 이해하신거 같아요. 사회과학자들이 계량화된 수치만 다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량화된 수치를 중시하는 제 주위의 사회'과학'자들이 저의 방법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님 말씀대로 수치가 아닌 스토리나 경험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자들도 있겠지요.
  • 덧붙여서 2012/07/08 00:33 # 삭제 답글

    데이비드가 문헌자료를 기초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맞습니다만 캄보디아의 역사의 현장을 모르는 학자로 단순히 묘사하시면 곤란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취지는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기자가 좀 더 생자료들을 접하기 쉽죠. 하지만 챈들러가 연구한 사료가 문헌자료에만 국한되는건 아니었습니다. 위에 올려두신 책은 매우 개론적인 책이고, 챈들러의 다른 저서들을 읽어보시면 그가 연구실에 앉아서 연구하는 학자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셨다는걸 알게되시리라 생각합니다.
  • 뭉군 2012/07/10 22:02 #

    취지는 이해하신다니, 그리고 아래 부경환씨도 잘 말씀하고 계시니 따로 설명드리진 않을게요. 대신 챈들러의 다른 책들 중 좋은 거 있으면 추천 부탁드려요 ㅎ
  • suasdei 2012/07/09 02:2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부경환입니다.
    좋은 글과 댓글 모두 잘 봤습니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고자 저도 댓글을 답니다. 원래 글쓴이(뭉군)께서 글을 쓰실 때 생각하고 의도하시는 바가 있을 터라 제가 먼저 이렇게 한마디 더하는 것이 조금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관련 내용을 잘 모르는 다른 분들께서 조금은 잘못된 정보를 접하게 될까봐 감히 몇 마디 덧붙입니다.

    우선 한국에서 인류학은 단순히 인문과학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소속 대학만 보더라도 사회과학대에 소속된 곳이 있고, 인문대에 소속된 곳이 있죠.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과 국가마다, 각 학교마다 인류학의 성격과 범주를 정의하는 것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인류학을 "가장 사회과학에 가까운 인문학, 가장 인문학에 가까운 사회과학"이라고 일컫기도 하죠.

    첫 번째 댓글에서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서 말하자면, 물론 사회과학이 계랑화된 수치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쓴이가 그 말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네요. (과학이라는 단어에 작은따옴표가 되어 있죠.) 그리고 덧붙이자면, 근래에 인기를 끌고 있는 소위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것이 사회과학 내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댓글에서,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챈들러 교수와 정문태 기자의 글과 글투의 성격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연히 그 둘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학자가 쓴 글과 기자가 쓴 글은 애초에 목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죠.) 본문 어디에서도 챈들러 교수를 "캄보디아 역사의 현장을 모르는 학자로 단순히 묘사"한 곳은 보이지 않는데, 댓글을 다신 분께서 너무 지나치게 해석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정보가 많이 오고가고, 생산적인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글쓴이 뭉군 님과 댓글로 관심을 표하신 분 모두 감사합니다. :)
  • 뭉군 2012/07/10 22:06 #

    원저자가 친히 댓글을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
  • 지나가다 2012/07/11 20:48 # 삭제 답글

    돌아와 다시 보니 제가 본문을 편협하게 받아들인 점이 보이네요. (편협한 지적드린 점과는 별개로 본문이 유익하여 즐겨찾기 해두었던 참입니다) 부경환님 지적해 주신점 감사드리구요, 뭉군님 저는 개인적으로 챈들러의 저작중, 예일대학에서 나온 At the edge of the forest (챈들러의 논문을 토대로 다른 학자들이 헌정한 논문들을 엮은 책입니다)와 알렉산드라 칸트와 공저한 People of virtue를 관심읽게 읽었습니다.
  • suasdei 2012/07/14 17:16 # 삭제

    안녕하세요. At the Edge of the Forest는 저도 몰랐던 책인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부탁드릴게요! :)
  • 2012/09/15 22: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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