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 ISEAS by 뭉군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을 연구하고 싶어요" 
나는 대선 출정하는 여느 정치인들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지도교수는 침착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석사시절에 무슨 큰 연구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Literature review나 잘하고 오늘부터 ISEAS 가서 필리핀신문을 좀 뒤져보세요"

그렇게 해서 다음날부터 출근하게 된 곳이 ISEAS(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였다. 싱가포르국립대 캠퍼스 내에서도 약간 구석진 곳에 위치한 탓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2년간의 싱가포르 생활중 그때가 처음이었다. 1968년 정부 주도로 설립된 이래 동남아연구로 이름 좀 들어봤다싶은 학자들이 머물며 연구했던 곳이었지만 딱히 갈 일은 없었던 까닭이다. 

연구소는 생각만큼 으리으리했다. 단독연구소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 잉어들을 비롯한 선굵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정원을 지나 본관으로 가니 카운터가 보인다. 다가가 간단히 내 신분과 이용목적을 밝히고 시설에 대한 이용을 신청했다. 까다롭진 않았지만 그들은 연구소를 이용하는 댓가로 내 석사 졸업논문이 완성되면 연구소에 한 부를 기증할 것을 요구했다. 나야 영광이지. 누가 내 졸고를 읽어 주겠나만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까먹고는 아직도 기증을 못하고 있다)

당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3개월이었다. 그 기간동안 필리핀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문인 Philippine Daily Inquirer 의 20년치 기록을 훑어보는 목표를 세웠다. 피플파워의 스멜이 조금씩 풍겼던 1983년부터 내 연구주제인 필리핀 부재자 투표법(Overseas Voting Act)이 통과되었던 2003년까지가 그 대상이었다. 


매일같이 하루종일 카운터 앞자리에 위치한 마이크로 필름 리더기 앞에 앉아서 주구장창 필름을 돌렸다. 마이크로 필름을 뒤지는 탓에 검색어로 원하는 기사를 찾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하루치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리다가 내가 노리는 단어들이 나오면 해당기사를 복사하는 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 노가다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필리핀 사회에 대해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지도교수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당시 필리핀 20년을 들여다보며 남겼던 내 노트엔 몇가지 인상적인 사항이 저장되어 있다. 

- 섬나라의 불리한 통신여건 때문인지 전국 일간지에 각종 시험 합격자 발표 
        (특히 사법시험에 대한 관심도 아주 높다)
- 값싼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가 (죽은 사람 시체 사진에 실리고 "slain" 이라는 단어가 빈번)
- 뭔 선거개표를 일주일 넘게 하나 
- UP(필리핀국립대) 신입생 명단까지 신문에 게재될 정도로 UP가 선망의 대상이고나 (94/Apr/2)
- 성경구절이 매일 신문에 수록되는 나라
- 미스 유니버스에 대한 과도한 관심 (카톨릭 나라와 온갖 야한 사진이 판치는 신문이라)
- 매년 초 폭죽놀이로 여러사람 사상


이처럼 필리핀에 대한 깨알같은 지식도 얻게 되고 논문에 상당히 도움이 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하긴 했지만 불과 한달후에 필리핀 아테네오대학(Ateneo de Manila University) 리잘(Rizal) 도서관에 방문한 나는 내 미련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곳에는 Philippine Daily Inquirer 의 모든 내용이 전산화되어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삼개월이 걸린 닭짓이 리잘 도서관 귀퉁이에 앉아서 사흘이면 끝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니. 그래도 유의미한 닭짓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ISEAS 에서 머문 3개월은 석사과정의 말미라 수업도 없고 친한 친구들도 싱가포르를 떠난 시절이었다. 그나마 대학원생 방에 가야 밥먹을 친구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ISEAS 가 다른 건물들과 워낙 멀리 떨어져 위치한 탓에 그것마저 귀찮아진 나는 석달동안 점심시간을 살짝 비켜간 시간에 주위 캔틴이나 레스토랑을 이용하곤 했다. 연구소 바로 옆건물 레스토랑은 꽤나 저렴한 가격에 이런저런 음식을 팔았었는데 호커스톨의 일상 음식들에 넌더리가 난 탓에 별미라면 별미였다. 

오늘 ISEAS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우연히 발견한 Global Think Tank Ranking Global_Think_Tank_Ranking.pdf이라는 자료때문이었다. 전세계 싱크탱크 기관들의 지명도, 정부 정책에의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매긴 랭킹인데 (별별 순위를 다 매기는 구나) 여기서 ISEAS 는 아시아 지역 21위에 올랐다. 다른 싱가포르 싱크탱크 세 곳이 높은 순위에 올라있어 딱히 좋은 순위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이름이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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