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줌머인을 아십니까 by 뭉군



인터뷰는 오래 전에 했건만 컴퓨터 속에서 꽤나 묻혀 있었다. 난민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참 각자의 사연이 다양하구나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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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d TV July 16 "[기획기사] 한국내 난민을 찾아서, <4> 방글라데시에서 온 줌머인"
http://saladtv.kr/?document_srl=98608

방글라데시의 동남쪽,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치타공산악지대 (Chittagong Hill Tracts)라는 곳에서는 수 백년 동안 ‘벌목과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소수민족, 줌머인들이 살아왔다.

평화롭게 자연과 어울리며 살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더 이상 벌목과 화전을 일구지 않게 됐다. 2차대전 이후 탄생한 파키스탄이 언어, 종교, 인종이 다른 줌머족을 동화정책의 대상으로 여기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 그 이유였다. 1960년대부터 동파키스탄 정부가 치타공산악지대에 거대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경작 가능한 땅의 40%를 잃은 10만여 명의 줌머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줌머인들은 자치의 희망에 부풀었지만 방글라데시 정부하에서도 파키스탄 정부와 다름없는 소외정책이 이어졌다. 정부는 치타공산악지대에 군대를 파견했고 방글라데시의 주류인종이었던 벵갈리인들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줌머인들에 따르면 이후 군부에 의해 대량학살, 강간, 방황 등이 자행됐고 많은 줌머인들이 이유없이 감옥에 갇혔다.

인종차별과 인권문제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자 남아있는 이들은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어 정부군에 반해 싸워야 했고 다른 이들은 인접국인 인도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이어갔다. 이렇게 이주를 감행한 사람들 중 한국에 온 사람들은 50여 명 남짓 된다. 어떤 사연으로 생소한 나라 한국을 찾게 된 것일까. 한국에서 줌머인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재한줌머인연대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줌머인을 만나다

“당산역에서 60-3 버스를 타고 김포 양곡리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재한줌머인연대 (Jumma Peoples Network Korea, JPNK)의 로넬 사무국장이 능숙한 한국말로 일러주었다. 김포가 서울 근교이겠거니 생각하며 버스를 탔는데 예상치 못하게 버스는 1시간 20분여를 내달려 양곡터미널 앞에 내려준다.

로넬씨의 환대를 받아 줌머인연대 사무실에 들어가니 열살 남짓의 아들이 있다. 능숙하게 아들과 한국어를 주고 받는 로넬씨. 한국어와 줌머말을 섞어 쓴다고 말한다. 아들에겐 한국어가 더 편해 보였다.

인터뷰에 합석하기 위해 또다른 줌머인 상기다씨도 딸과 함께 왔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줌머인들이 가장 심각하게 겪는 문제가 자녀문제인 만큼 일부러 불렀다고 로넬씨가 귀뜸한다. 상기다씨는 먼저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은 남편을 따라 지난 2005년 입국했다.

로넬씨는 1994년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처음 한국에 입국했다고 말했다. 일을 하기 위해 왔지만 사실상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해외로 나온 성격이 강했다. 로넬씨는 이를 두고 90년대 들어 운송수단의 다변화, 보편화로 박해받던 줌머인들이 주변국인 인도 외에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치타공 산악 지대 사람들의 연대 연합’이라는 줌머인 정당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로넬씨를 비롯한 재외 줌머인들은 한줄기 희망을 갖고 고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희망이 부질없는 바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부는 단계적 실행을 약속했지만 현재 큼지막한 약속들은 실행이 안된 상태에요. 우리 줌머인은 정부측에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군대의 철수 ▲빼앗긴 토지 문제의 해결 ▲60만 벵갈리 정착민들의 철수 ▲자결권 확보 등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정부는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평화협정을 둘러싸고 줌머인들간에 내전까지 벌어졌다. 완전자치를 요구하는 세력과 평화협정을 맺은 세력간 의견차이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좌절된 희망, 다시 한국행

다시 고향에 정착할 희망을 잃은 로넬씨는 2002년 다시 한국에 왔다. 줌머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재한줌머인연대를 만드는데 협력했다. 이후 줌머인연대는 한국사회에 줌머인들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알리면서 고유한 문화에 대해서도 홍보하는 한편, 치타공 산악지대의 줌머인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해오고 있다.

로넬씨는 2002년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당시 한국에 줌머인 활동가가 전무한 까닭에 자신의 난민 신청이 가능한 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이미 몇 차례 체포된 경험이 있는 그는 돌아가면 십중팔구 감옥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돌아갈 수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알게 된 재일본 줌머인들의 도움을 받아 줌머인들도 난민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어서 유엔난민기구(UNHCR)의 주선으로 같은 해 10월 법무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수 있었다.

난민 인정은 2년만인 2004년에 받을 수 있었다. 박해의 사실이 비교적 쉽게 입증됐던 탓인지 심사과정 중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전문 통역인 없이 한국어로 인터뷰를 한 것과 가끔 면담인이 심문하는 스타일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기억으로 남는다고 로넬씨는 말한다.

로넬씨 옆에서 인터뷰를 참관한 상기다씨는 남편이 먼저 한국정부에 의해 난민인정을 받은 상태에서 난민협약에서 규정하는 가족결합의 원칙에 의해 2005년 한국으로 와서 난민 신청을 했다. 상기다씨의 경우 따로 심사 없이 난민인정서를 내주어야 하지만 그녀가 찾아갔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이런 사항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고 한다. 첫 방문에서 “일주일 후에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일주일 후에 방문한 자리에서도 또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비자가 정한 시한을 넘겨 “외국에 한 번 갔다 오라”는 말까지 들은 후에야 간신히 난민 인정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

“난민 인정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지원이 절실합니다.”

로넬씨와 상기다씨는 난민 신청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보다는 인정을 받은 후 한국사회에서 살아오며 느낀 막막함에 대해 더 힘주어 말했다. 줌머인 난민 인정자들이 대부분 가족단위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이와 관련한 어려움이 더 많아 보였다.

로넬씨는 “먹고 사는 것도 문제긴 한데 그것보다는 한국에 장기적으로 살게 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같은게 있다”고 말한다. 혼자라면 어떻게 간신히 먹고 살텐데 가족이 있는 탓에 자녀들 교육도 시킬려면 적어도 한국사회의 최저 생활 수준에라도 맞춰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불안하다는 것이 불안의 요체였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한다고 하면 외국인이라고 은행에서도 대출도 힘들어요. 국민임대주택을 신청하려 해도 외국인이라서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한국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인정서는 받았는데 외국인이라고 이것저것 제한을 받는데다 최저생활에 대한 보장조차 없어서 한국사람들과 나란히 살아가기 힘들다는 호소였다.

한 아이의 엄마인 상기다씨도 한국에서 아이 키우기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하는데 한 달에 70만원 이라는 거에요. 동사무소에서 어린이집 비용을 지원한다길래 알아봤는데 난민들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애들 교육시키기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정부에서 조금이나마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방글라데시에서 간호대학을 나와 간호사로 일했던 상기다씨는 한국에서 경력을 살리고 싶었지만 어느 병원도 그의 간호사 자격증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외국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정부가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췄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선 난민 가족들에게 어떤 처우를 해주고 있을까. 줌머인들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서반구의 영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 난민인정을 받아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외국에서 사는 줌머인들의 처지를 물었다. 로넬씨는 “(자신이 그들에게 한국정부의 처우를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캐나다의 경우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사회보장에 관한 사항들을 정부가 알아서 해주는 것은 물론, 취업 알선도 정부가 강력하게 나선다고 한다. 심지어 난민들이 자녀를 얼마나 잘 돌보고 있는지까지 확인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가 펴낸 2006 인권논문에 실린 최원근씨의 논문에 따르면 캐나다의 경우 최대 1년 혹은 자활자립이 가능한 시점까지 재정착 지원기금을 난민인정자들에게 지원하는 한편 이들에게 집세 등에 필요한 비용을 대출지원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논문에는 또한 한국과 비슷한 인구와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한 폴란드의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폴란드의 경우 난민들에게 폴란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 생계지원, 폴란드어 수업을 받은 비용을 정부가 부담, 난민들이 고등교육을 원할 경우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난민정책의 일부로 두고 있다. 특히 폴란드의 난민수용시설은 체제비용이 없는 난민신청자들에게 숙식과 의료지원은 물론, 용돈까지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한국의 제도는 로넬씨의 말처럼 부끄러운 수준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넬씨와 상기다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상기다씨는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고 싶지만 가족이 이미 한국에 정착했고 방글라데시 현지 사정으로 돌아가는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로넬씨 역시 “조금 더 한국과 줌머인의 관계를 발전시킨 후에 돌아가고 싶다”라고 계획을 밝혔다. 덧붙여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사회통합과정이 길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한국에 사는 동안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난민의 존재가 한국의 다문화 사회통합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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