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 by 뭉군



Salad TV June 24 "[기획기사] 한국내 난민을 찾아서, <3>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
http://saladtv.kr/?document_srl=97289

콩고 난민 분은 인터뷰 초반부터 나의 정체를 살피는 듯 했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방송사에서 나왔다니 뭔가 의심스러울 만도 한데 끝까지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진심을 전하려도 두 눈을 꿈뻑거리며 촉촉한 눈망울을 비추려 했으나 별로 안 통한 듯. 그는 인터뷰 내내 "Do you understand?" 라고 되물었다. 한국에 와서 영어를 못해 난민 심사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어 그러나 하고 이해하려 했다. 왜곡하지 말라는 당부가 아닐까나...

"Do you know what it means living in fear?" 라고 되묻던 나이지리아 난민의 눈빛이 강렬하게 가슴팍에 쏘아박혔더랬다. 때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도 가슴속에 쏘아박혀 연대의 씨를 일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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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국가비상사태, 내전, 해적, 학살...


 

한 일간지의 웹사이트에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입력해 얻은 기사에서 쓰인 단어들이다. 위의 무시무시한 표현 이외에 가끔 2010년 월드컵과 민주선거 이야기가 들리긴 하나 이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안정된 소수의 나라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식일 뿐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위기는 이들 국가에서 발생하는 난민 행렬로 확인할 수 있다. 유엔난민기구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여타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 숫자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아프리카의 난민 숫자가 매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언급했지만 여전히 전세계 천 만에 달하는 난민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위기는 최근 경제위기를 맞아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 3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아프리카가 외국인 투자감소, 주요 수출품인 농산물 가격의 폭락, 그리고 해외원조 급감 등에 시달리고 있는 탓에 경제적 정치적 불안이 더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난민들은 주변국가나 유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08년 6월 법무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2000여 명의 신청자 중 아프리카 출신이 752명으로 1/3을 넘어섰다고 밝히고 있다. 낯선 곳에서 왔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자는 콩고에서 온 난민 인정자 한 명과 나이지리아에서 온 난민 신청자 두 사람을 만났다.


 

콩고, 총성이 멎지 않은 곳


 

콩고민주공화국 (Democratic Republic of Congo)이 내전에 휘말리게 된 시점은 1994년부터다. 당시 자이레라는 국명을 지녔던 콩고는 접경에 르완다를 두고 있었는데 르완다에서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밀고 밀리는 내전과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고 긴 싸움에서 결국 투치족이 정부를 장악하자 후투족은 보복을 피해 국경을 넘어 콩고로 피신했다. 콩고 정부는 후투족이 콩고 영토내에서 벌이는 투치족에 대한 보복성 학살을 방관하다가 급기야 투치 반군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투쟁에 휘말렸고 이 내전에 르완다와 우간다까지 참여해 국제전으로 확산된 바 있다. 2003년 기나긴 싸움은 종전을 맞았지만 여전히 총성은 멎지 않았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2002년 9월 콩고에서 무질서가 횡행할 때 콩고인 Y씨가 한국에 입국했다. 정부의 정보부서에서 일하던 그는 정부의 "추악함"을 자주 목격했다고 말한다. 수백만 명이 전쟁과 학살로 죽어나가는 현실을 목도한 그는 반정부 언론과 야당에 정보를 알려주고 급기야 쿠데타를 시도하는 세력과 협력했다.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던 그는 결국 낌새를 챈 정부세력에 붙잡혀 감옥으로 보내졌다.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라 두려웠던 Y씨는 탈출을 감행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국비자를 만들어 중국으로 도망 왔지만 중국은 콩고의 정부기관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여전히 위험이 존재한다고 느낀 그는 그를 도와주는 친구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누구도 난민으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제가 한국에 온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친구의 제안으로 오게 됐는데 저는 그 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올림픽과 월드컵 뿐이었어요. 처음 도착해 서울의 거리를 보면서도 '아 평양이 이렇게 발달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왜 한국으로 오게 됐냐는 질문에 질린 듯 했다. 한국사람들은 그 이유를 항상 궁금해 하지만 난민의 입장에서 한국이든 어디든 안중에 없었을 테다.


 

낯선 한국


 

한국에 온 그는 여러 도움을 얻어 입국 후 3개월 만인 2002년 11월에 난민 지위 신청을 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불허 통보를 받은 것은 2년 6개월여가 지난 2005년 5월이었다. 불허 통보에 이의신청을 하고 재차 불허 통보가 나오자 그는 많은 난민 신청자들이 그러하듯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법원은 그에게 난민인정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이례적으로 법무부는 항소를 포기했다.


 

"신청 후 출입국관리소에서 인터뷰를 15번 정도 했는데 인터뷰어가 매번 같은 사람이었어요. 소통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면담인은 대체로 친절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Y씨.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한국에 왔을 때 Y씨는 모국어인 불어밖에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가 모두 영어로 진행된 까닭에 그는 속 시원히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한다.


 

"한 번은 영어단어를 불어와 착각해서 이해한 탓에 제가 같은 질문을 다른 표현으로 두 번 받았는데 이에 서로 다른 답변을 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제가 영어에 서툴러서 그랬다고 아무리 제 상황을 설명해도 그 면담인은 계속 저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더라구요"


 

"제 난민 신청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10여 명의 면담관과 면담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어 통역사가 동석해 제 입장을 전달했는데 제가 그와 이야기해 보니까 불어를 너무 못하는 거에요. 스스로 저에게 말하길 프랑스에 유학 다녀온지 6년이나 되서 많이 잊었다고 말하더라구요. 제 이야기를 어떻게 한국말로 통역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면담이 끝나고 저에게 와서 '미안하다'라고 그러더라구요. 스스로도 제 이야기를 잘 전달하지 못했던 것을 알았던 거죠."


 

Y씨가 겪은 통역상 어려움은 그저 옛날 이야기인 것일까? 서울 출입국사무소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불어를 포함한 난민 신청자가 원하는 모든 언어로 통역을 제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8년 행한 난민 실태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전체 응답자 중 87.4%가 면담을 영어와 한국어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직 소수 언어에 대한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Y씨는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5년 반을 보냈다. 그동안 생계는 어떻게 꾸렸을까. 그는 한국에서의 취업활동을 허용치 않는 난민 신청자로써의 생활이 "죽으란 이야기나 다름 없다"며 "감옥보다 더 열악하다"라고 한탄했다. 일을 할 수 있는 E-9비자가 있다고 생계형 거짓말을 해가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10시간 정도 일을 하기로 계약했지만 일손이 없다고 빨리 나오라고 하고 근무 교대 시간에는 정작 교대자가 늦게 나와 15시간씩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신청한 지 5년 반이 지난 2008년 3월 난민 지위를 얻었다. 난민 지위를 얻고 달라진 것은 없냐고 물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아뇨 없어요." 재차 정말 없냐고 물었다. "네 정말 없어요".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느라 일할 시간도 없지만 난민 지위 인정 후 한 때 일을 하고자 공장을 전전했으나 고용주들은 난민비자인 F-2-2비자가 일을 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르고 무조건 E-9비자를 얻어오라고 거절 당했다고 한다. 의료보험은 있지만 낼 돈이 버거워 힘든 것은 마찬가지.


 

난민이 되고 콩고에 숨어지낸 가족들을 한국으로 불러올 수 있었지만 생활이 윤택할 리 없었다. 아내도 예전보다 못한 생활에 불만이 많고 콩고에서 학교도 못 다닌 두 자녀는 여기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다니는데 동네에서 따돌림까지 당하고 있다. 인터뷰 당일 아침에도 "자녀들이 학교 가는 길에 동네 아이들에게 맞았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머나먼 한국까지 가족들을 데려온 죄책감이 묻어 나왔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난민들


 

나이지리아에서 온 난민들을 만난 것은 난민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한 시민단체에서였다. 상담을 위해 찾은 D씨와 I씨를 만났는데 모두 기독교인으로 본국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는 주로 남부에 거주하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40%에 이르지만 북부에 모여사는 나머지 절반 정도의 무슬림들과 끊임없는 갈등관계를 유지해 왔다. 더욱이 1999년 나이지리아가 민주화 대열에 합류하면서 정치적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각 지역에서 자치적으로 취해진 종교간 배타적 조치들로 정치적 갈등의 비등점을 낮추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유혈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D씨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주변인들에 의해 독살 당하고 자신만 도망쳐 온 신세였다. 자신이 살던 곳이 인터넷은 물론 전화도 마땅치 않은 탓에 본인의 박해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은 듯 했다. 2008년에 한국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한 D씨는 1년 만에 불허판정을 받고 소송을 준비중이다. 기자에게 보여준 그의 불허통지서는 서너 문장의 간단한 내용이었다. "제출된 자료의 진술 및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난민협약의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에 해당" 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라는 내용이 주된 이유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소송에서 지면 본국으로 강제 출국 당할 수도 있다"고 D씨를 상담하던 한 사람이 조심스레 말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D씨가 말했다. "공포 속에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아세요? 저는 죽어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역시 나이지리아 출신 난민인 I씨도 종교적 박해로 한국으로 피난 온 처지였다.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위협을 느껴 탈출한 그 역시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증언이나 박해의 사실을 입증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미 한차례 불허판정과 이의신청을 거쳤고 현재 행정소송을 준비중인 그 역시 박해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어려워 하고 있었다. "소송으로 가도 가능성이 그리 높진 않을 것 같다"라는 상담원의 조심스런 예측에도 "그래도 하겠다"며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집 같은 곳이 또 어딨겠냐"고 말하는 I씨. 돌아가고 싶어도 연락조차 안되는 가족들을 만나기 어려울 뿐더러 죽음의 위협을 무릎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그가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I씨가 법무부로부터 받은 불허통지서는 D씨의 그것과 비슷한 서너 줄의 형식적 불허 이유 외에도 별지에 구체적인 불허의 이유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I씨를 황당하게 만든 것은 구체적 불허 이유가 오로지 한국어로만 기재돼 있는 것이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번역본을 받아 보았으나 그 이유가 그를 더 놀랍게 했다. 번역된 구체적 불허 이유에 따르면 ▲면담 때마다 다르게 진술 ▲차별이나 구체적 박해를 받은 적이 없다 ▲가족들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등이 구체적 사유로 제시되었는데 I씨는 첫 번째 이유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맹세코 저는 난민 지위 신청 이후 면담을 단 한차례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면담도 안하고 면담 때마다 다르게 진술했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불허 통지서를 받던 날, I씨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위의 황당함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라고 묻자, 한 직원이 말하기를, "아니요, 안돼요"라고 답했다 한다.


 

기자가 서울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결과 "사무소 기록에 따르면 I씨는 분명히 면담을 했습니다. 몇 번인지는 확인해 드릴 수가 없어요. 설마 저희가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라는 답변을 받았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다.


 

기자가 만난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은 주로 한국 난민 제도상 문제점 보다 자신들을 대하는 일부 직원의 일방적 태도를 지적했다. 여전히 한국인들이 가진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정보부족이 객관적인 난민 제도의 운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콩고난민 Y씨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귀담아 들을만 하다. "한국인의 시각이 아닌 난민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문제를 접근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면담을 할 때도 면담인이 자꾸 저에게 콩고 공항을 어떻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냐고 말도 안된다는 듯이 자꾸 캐묻는 거에요. 그건 그 분이 인천공항을 공항에 대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그리고 있으니까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콩고 공항은 와보면 알겠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거든요."


 

다음 편에서는 방글라데시 소수민족인 줌머인들을 만난다. 이들은 대부분 난민 인정을 받고 주로 가족단위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홀로 한국에 입국해 생활하는 난민들과는 달리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난민들의 정착 문제에 대해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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