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가면 누구나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운명인데 병마가 덮치면 유난히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걸어온 인생의 부침이 클수록 그러한데, 한때 최고권력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일수록 그 뒤안길이 더 쓸쓸해 보인다. 특히나 그가 무소불위의 독재자였을 경우 위축감은 배가 되는 듯하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이제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고 있지만(88세) 올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의 압도적이지 못한 승리로 인해 일말의 압력과 책임감을 느껴 일선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고문총리 (Minister Mentor)라는 직함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전설의 정치인이다. 그런 그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으니 최근 말초신경계 이상증상으로 인해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 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의사인 그의 딸이 이를 공개했으나 그녀는 병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정신상태 만큼은 멀쩡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며 권력누수를 방지하는데 만전을 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음이 턱밑까지 드리웠을 때도 리콴유는 아마 명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싱가포르의 미래를 기획하는 유언을 남길 것이다. 남겨진 여당은 유훈정치를 하며 근근히 지지율을 유지할테고.
[머리도, 옷도 하얗게 변해 진정한 PAP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그]
지난 2008년 리콴유와 긴밀한 사이였던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가 사경을 헤맬 무렵, 리콴유는 친히 자카르타로 날아가 수하르토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리콴유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 30년간 본인과 긴밀하게 협력해온 오랜 친구가 국민들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 그래, (수하르토의 재임기간에) 부정부패는 있었다.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특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그의 통치기간동안) 국가발전과 성장이 있지 않았는가"
"I feel sad to see a very old friend with whom I had worked closely over the last 30 years, not really getting the honors that he deserves," Lee told journalists for Singapore media after the visit, according to a Channel News Asia report. "Yes, there was corruption. Yes, he gave favors to his family and his friends. But there was real growth and real progress," Lee was quoted as saying.
(기사출처)
리콴유는 병석에 누운 친구의 모습에서 무얼 본 것일까. 병든 사자는 더이상 위험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게 애초에 국민들에게 사자가 되기 보다는 왜 듬직한 코끼리가 되어주지 못했을까만은 리콴유는 나름 진정으로 자신과 같은 권위주의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를 몰라주는 사람들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싱가포르 국민들에게는 죽는 그날까지 흐트러짐없는 엄한 아버지상으로 남기로 한 듯 싶다. (2008년,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젊은이의 질문에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면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 전 대통령은 리콴유 전 총리에 비하면 젊은 편(66세)이긴 하지만 몸 상태는 더 나빠보인다. 지난 201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하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생명을 이어온 그녀는 최근 뼈에 문제가 있음을 이유로 치료차 국외출국을 시도하다가 공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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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그녀의 비행을 막아선 것인데 이유는 현재 조사중인 아로요 전 대통령 내외의 각종 부정행위와 비리에 대한 조사 필요성으로 인해 아로요를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로요가 목적지로 잡은 싱가포르가 필리핀과 범죄자 인도협정을 미체결한 국가라서 더욱 의심스럽다는 점을 추가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아키노 대통령이 내린 출국금지조치는 최근 대법원이 '아로요에 대한 출국금지는 무효'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스르고 강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정의의 수호자인 (그러나 상당수가 아로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 결정을 무시한 셈인데,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동의할 만한 조치이긴 하나,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필리핀 정치의 뿌리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일말의 증거라 하겠다. 지난 2001년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으로부터 쫓겨날 때도(아이러니하게도 에스트라다 대통령 탄핵과 후임인 아로요 대통령취임에 앞장선 이가 아키노 대통령의 어머니인 코라존 아키노 전 대통령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의 절차를 거쳤는데, 의회에서 에스트라다 탄핵이 희박해지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힘(피플파워?)으로 탄핵을 성사시킨 바 있다.
어쨌든 찾아온 병마에 대해 대처하는 리콴유와 아로요의 방식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약간은 마지못해) 인정한 리콴유는 애써 밝히기를, 자신은 거동이 조금 불편한 뿐 여전히 싱가포르를 위해 정신적 사고가 가능하다며 자신의 건재함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정부의 불허가 예상되면서도 공항까지 굳이 찾아갔던 아로요는 휠체어와 뼈 지지대에 몸을 맡긴 채, 화장기없는 퀭한 얼굴로 카메라 세례를 맞이했다.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지나친 긍정과 부정을 보이는 두사람의 전략은 위험하다.
희귀성 뼈 질환이라는 아로요가 휠체어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그녀의 빠른 회복력에 감탄하기 보다는 조소를 날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국민들이 그랬듯이 정치인들의 급작스런 건강변화는 금세 잊혀질 것이다. (mb가 후보시절 한 토론회에서 자신의 병역면제 사유를 밝히는 순간에 헛기침을 연신 내뱉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시덥잖은 사람이구나 했던 기억이...)
리콴유의 건강 이상설을 부정하는 움직임 역시 싱가포르 정치인들이 리콴유 사후의 싱가포르를 차분히 준비하는데 방해요인만 될 것이다. 그가 남아있는 한 그에 기대서 다른 여지는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다시금 느끼지만,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국가원로를 가진 나라는 참말로 부러운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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