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가 구글로 말을 걸어왔다. 반가워서 바쁜 와중에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선물에 넣어 한 달 전에 보냈단다. (배로 보낸 것이냐...)
당시 미국 내 아시아 관련 단체로부터 펀딩을 받아 동남아로 필드웍을 가는 길에 한국에 들린 친구였는데, 경복궁에서 나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진 한 장을 필드웍 결과보고서에 하나 슬쩍 끼워 넣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동남아인지 서울인지 미국 사람들은 모를 거라면서. 아직도 미국 사람들에게 아시아는 그렇게 획일적인 이미지일까.
친구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캐나다 대학에 있는 한 정치학자가 숫자를 쓰지 않고 동남아 정치를 들여다 본다는 정보를 들었고 싱가포르의 동남아연구소(ISEAS)에서 이번에 새로 동남아 소식지를 발간했다는 것도 알았다.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 친구가 준 ISEAS Monitor 2012년 1호를 얼른 펼쳤다.
동남아 국가들의 주요한 정치 및 사회분야 소식들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소식지였다. 일반 언론만큼 시의성이 있는 주제들이면서 내용은 더 깊고 풍부해 보였다. 한편으로 이코노미스트에서 다루는 아시아 소식들보다 커버하는 국가는 많지만 뭔가 특유의 학자풍의 문체가 곳곳에 배여 안그래도 재미없는 정치 및 사회 소식을 더 지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안습이었다. 돈주고 사긴 아깝지만 (그래서 무료인듯) 주기적으로 동남아 소식을 빠른 시간안에 업데이트 하고자 하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읽으러 가기)
ASEAN Monitor는 Asian Survey 라는 학술지의 요약본 정도를 표방하는 듯 보였다. SSCI라는 학술계의 품질인증 마크를 단 '우수' 학술지로 평가받는 Asian Survey는 두달에 한번씩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경제,사회 소식을 비교적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전달하는데, 내용이 조금 긴 편이라 매번 긴 글을 읽기엔 벅차고 돈주고 보는 것을 아까워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꺼려할 만한 학술지다. (유료지만 최소한 목차는 볼 수 있다) 그런 나같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나름의 틈새를 노린 ASEAN Monitor의 위치선정이 나쁘지 않았다.
지역 전체의 이슈를 먼저 요약해 주고 국가별 소식은 캄보디아부터 시작하는 ASEAN Monitor를 읽으면서 계속 뒷쪽에 있을 싱가포르 소식이 궁금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필진이 과연 싱가포르에선 어떤 소식을 중요하다고 다뤘을지를 알고 싶었다. ASEAN Monitor 를 펴내는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는 싱가포르 정부의 상당한 재정 지원을 받고 있기에 싱크탱크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할 수 있는 물주의 행동에 어떤 기준을 들이댈 수 있을 것인가.
호기심을 꾹꾹 참고 펼쳐본 싱가포르 섹션에서 크게 두가지 이슈가 다뤄졌다. 첫째, 최근 사회를 들썩이게 한 몇가지 사건들이 싱가포르가 가진 "청렴함(non-corruption)",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평판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의 향후 조치를 예상한 대목이 사뭇 비장하다.
"정부는 이러한 논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마 부정부패에 연루된 이들에게 신속하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동요하는) 민심을 다잡으로 할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범법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사법부가 할 일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워낙 사법부와 행정부가 긴밀하게 협조하는 나라니까 그러려니 한다. 싱가포르 정부를 정의의 수호자와 등치시키는 단락을 읽으며 문득 앞서 다른 나라의 정치상황을 분석할 때 표현했던 거침없음은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캄보디아 섹션에선 상원 의회가 거수기(rubber stamp upper house)라는 표현이 있었고 (p2),
인도네시아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로 가지 못하고 사실 퇴화(overall deterioration in earlier democratic achievements)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며(p3),
말레이시아에서는 정부여당이 소유한 미디어와 그 프락치 NGO단체들이 인종과 종교 문제를 건드리며 정국을 혼란케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p4),
미얀마에서는 최근 숨통이 트인 야당이 누리는 정치적 공간이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와 규정들에 의해 다시 제한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이 나왔다 (p5).
사실 위에서 썼던 상당수의 나쁜 어감의 단어들이 싱가포르에도 존재하는 것들 아닌가? 거수기 의회, 민주주의의 퇴화, 정부여당이 소유한 미디어,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와 규정들에 의한 정치적 공간의 제한...
그러나 싱가포르의 두번째 소식은 첫번째보다 더 찌라시 수준이다. 싱가포르의 주요 야당인 노동자 당(Workers' Party)의 한 국회의원이 당내 기혼여성 당직자와 바람이 나서 당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예상되는 재선거에 따른 정치적 파장을 분석했는데, 솔직히 좀 악의적인 분석 아닌가? 싱가포르 소식 말미에 살짝 언급한 "2011년 총선에서 야당이 올린 혁혁한 성과(strong showing in the general election last year)"에 대한 원인 분석이나 현황에 대한 분석이 더 흥미있는 소식이 아닐런지.
참고로 Asian Survey의 2012년 2월호 게재내용 중 싱가포르를 다룬 논문의 초록은 아래와 같다.
"2011년 싱가포르 인들은 의회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대안보도와 커멘터리가 중심이 된 소셜네트워크 미디어가 정치적인 열기를 생성하고 대중 사이에서 반정부적 흐름을 결집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강력한 반정부적 흐름에 부딪친 정부여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사상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이게 싱가포르에서 벌어지는 진정 중요한 소식 아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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