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프리랜서 by 뭉군

오늘도 여행가방을 쌌다. 이렇게 아무때나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프리랜서라고 부른다. 자유롭게 시간조절을 해가며 쉴 수 있지 않느냐는 흰소리가 그 바탕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오후 두시의 지하철 객실에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는지 묻는다.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되는 이들의 얼굴에서 프리랜서의 자유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일없는 사람들, 방학맞은 대학생들, 외근나가는 직장인들의 눈빛은 출퇴근시간대 서로의 몸뚱이에 눌려 지친 직장인들의 그것보다 더 흐리고 초점을 잃은 모습이다. 왜일까. 쏟아지는 졸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빠르게 주변을 휘이 둘러 분위기를 먼저 살폈다. 이 칸에도 역시 끈적하게 늘어진 분위기다. 그 와중에 작달만한 한 남자가 구걸도 아니고 위압적인 눈빛을 달고 다니면서 칸칸의 부녀자들에게 적선을 요구한다.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니 씨바 여긴 그지 깽깽이 밖에 안탔어"

그가 물러가자 사람들은 희미하게 웃는다. 똥은 그저 더러울 뿐이니까.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이 칸에서 제일 활기만발한 남자다. 그러나 내가 일구는 사연들마저 그저 유쾌하게 들려서는 안된다. 시중에 나가면 이만오천원에 살 수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천원짜리 두장만 받고 파는 이유는 뭔가 그럴듯 하면서도 절절해야 한다. 백화점에 납품을 하던 중소기업이 부도가 났다거나 판로가 막혔다는 식의 예상치 못한 외부적 파고를 언급해야 한은 물론이다. 요즘은 애프터서비스도 기본이다. 되든 안되든 제품 껍데기에 공칠공 번호 하나는 남겨둬야 한다.

그러나 이미 구걸 난봉꾼이 한차례 휘젓고 간 까닭인지 객실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톤을 좀 높였다. 드디어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안내말씀 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없이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파시는 분께서는 지금 바로 하차해 주십시오."

나는 이 칸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짐짓 모른 척 딴청이다. 그러나 아이폰으로 신문을 읽던 청년의 눈동자는 더이상 굴러가지 않았고 수다를 떨던 아줌마의 입은 계속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다시 여행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다보니 문득 신세 한탄이다.

"안한다 안한다... 또 어떤 할 일없는 놈들이 전화했는 모양이구나...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전화를 하고 그래"

사람들은 나를 잡상인이라 부른다.

시드니 by 뭉군

...


2011년 12월 상도동 by 뭉군

눈을 떠보니 날이 느지막하다. 오전에 깨는 것은 기대도 안했지만 흠흠 벌써 해가 중천이라니.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이 방에서 나를 깨운건 순전히 바깥의 웅성임이었다. 가져갈 것이라곤 평생 내가 곁에 두고 썼던, 그러나 움츠러진 내 육체와 함께 녹슬어가는 온갖 연장들인 뿐인 우리집인데 뭔일이까.

"계십니까? 연탄나눔 운동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아 오늘 공짜연탄 삼백장이 들어온댔지. 나가보지도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싶어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그러고보니 연탄불도 꺼진 모양이다. 방바닥이 냉골이다. 나간 김에 불도 갈아야 쓰겄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리로 쌓으면 되죠? 아, 선생님 여기 싸인 좀 부탁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집에 들렀던 청년이다. 내민 종이위에 대충 이름 석자를 흘려놓고 죽어가는 연탄불을 들어내고 있자니 퍼런 조끼에 잠바때기를 겹겹이 입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추위를 녹일 듯한 젊음을 무기로 연탄배달을 시작한다. 이번치들은 여성비율도 많고 숫자도 몇안되는걸 보니 족히 사십분은 걸리겠군. 커피나 한잔씩 타줘야 쓰겄다.

문득 파란조끼 한 녀석이 다가와 묻는다.

"여긴 가스가 안들어오는 모양이네요. 연탄 보일러에는 연탄이 몇개나 들어가나요?"

질문을 듣긴 했지만 난 애시당초 대답할 뜻이 없었다.

"이거 보일러 얼마전에 바꾼건데 시원찮아. 내 인생이 얼마나 쪼그라들었으면 요즘 세상에 아직도 연탄보일러를 때겠어. 흐이구..."

이렇게 겨울이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구두로 내 신세를 떨어내는 것이 아까 장부에 싸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래야 적선을 받는 내 마음이 더 편하다고 해야할까.

집안으로 들어와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인스탄트 커피를 달달하게 탔다. 어느새 물러간 연탄배달자들을 찾아 골목길로 나섰다. 어제 서울에 눈이 꽤나 내렸다는데 그새 다 녹아버렸는지 찾을 수 없다. 하여튼 이 동네는 겨울날의 허튼 감상도 허용치 않는 곳이다.

집앞 가로등 기둥에는

"재개발하면 우리는 망한다"

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여전히 도사린다. 이미 이주가 시작된터라 동네 주민들의 상당수가 떠나고 갈 곳없어 남은 자들이 게워낸, 절박했던 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밤이면 밤마다 켜지던 가로등 불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민들이 떠난 자리는 길고양이들이 와서 채웠다. 지붕과 지붕을 타고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은 뭐 먹을게 있다고 이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황량해진 동네에서 남은 사람들을 반기는 고양이들에게 정을 붙여 어떤 주민들은 일부러 마당에 먹이를 두었다. 평화롭게 식사중인 고양이 가족을 지나치자니 도대체 누가 더 행복한지 모를 일이다.

잠시 쉬고 있는 파란 조끼 청년들에게 커피를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육쌈빌딩과 여의도의 으리한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동네가 목이 좋긴 한 모양이다.



살까 말까 79달러 킨들 by 뭉군

아마존의 야심작 그리고 애아빠의 희망, 킨들.


최근에 나온 킨들 베이직을 제품값 79불에 구매대행까지 포함해 약90불에 구입했다. 킨들 구입을 (약간 충동적으로 결정한) 이유는 미국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전자책의 인기 비결을 살짝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안읽는 책들로 들어차고 있는 우리집 작은방 책장의 너절함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킨다는 것이 아내에게 설명한 공식적 승인 신청 사유였고. 

며칠만에 우리집을 찾아온 킨들 박스는 단촐했다. 외관도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 상당히 가벼운 무게(170그램이다. 참고로 아이폰이 135그램)로 한손으로 들고 읽어도 팔에 무리를 주지 않는 크기였다. 손바닥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인 탓에(성인 남성만 해당될 듯) 한손으로 쥐고 페이지를 넘기며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번들거림이 없는 디스플레이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다만 전원을 켜고 끌 때는 하단부의 버튼을 약 7초간 누르고 있어야 하는 것과 충전기 플러그가 없고 컴퓨터에 꽂아 충전할 수 있게 만든 것들은 좀 의아했다. 애플에게 배웠는지, 조금씩 아쉬운 점들을 심어놓아 더 높은 버전의 제품을 찾도록 만드는 아마존의 훈훈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아니나 다를까, 킨들 구매 이후 아마존은 공격적으로 나에게 이런저런 부가상품 - 액세서리부터 전자책 그리고 킨들 파이어까지 - 을 팔려고 혈안이 되어 내 이메일 받은 편지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킨들의 첫화면을 켜면 보유한 책목록이 뜬다. 약간은 정리되지 않은 인상이다. 책을 더 구매하면 할수록 더 지저분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책과 문서들이 용량을 많이 차지해 놀랐다. 아마존 측의 설명에 따르면 몇 천권을 다운받아야 꽉차는 용량인데 2GB의 용량에서 이십여 권 다운받으니 불과 1300여 메가가 남는다. (추가: 나중에 아마존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은 약 1.25GB라고 함. 흠 그럼 몇천권 들어간다는 말이 맞을 듯)



책을 다운받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구매하거나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면) 킨들로 직접 책을 찾아 구매할 수 있었다. 사실 유료책은 아직 구매하지 않았다. 저작권 규제가 풀린 옛날책들로 충분히 즐거운 무료 독서를 할 수 있으며 유료책들도 서문을 비롯한 앞부분의 꽤나 많은 부분을 공짜로 읽을 수 있게 하는 바람에 이런 저런 책의 서문만 읽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 비춰볼 때, 전자책의 시대에 책의 서문이야 말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텐데 생각보다 엉성한 서문들이 많은 것은 의외다. 작가들이 대개 책을 다 쓰고나서 서문을 쓰는 탓에 필력이 소진되어 좋은 소개글이 나오지 않는듯 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전자책을 읽은 소감이라면, '꽤나 괜찮았다'라고 말하겠다. 여기에 큰 기여한 기능은 눈에 피로감을 주지 않는 전자잉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어에 커서만 갖다대면 영영사전이 작동한다는 점만으로 큰 시간절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책 펼쳤다가 모르는 단어 찾으며 시간을 허비하느라 정작 페이지는 넘기지 못한 많은 이들과 그 매력을 함께 나누고 싶다. ㅋ 

킨들의 또하나의 장점이라면 워드문서를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엠에스워드 등을 붙임파일로 해서 내게 주어진 킨들 아이디로 보내두면 킨들의 깔끔한 화면에서 정독할 수 있다. 상당히 간단하면서도 편리한 기능이다.

반면 킨들 79달러 제품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자체 라이트가 없다는 점이다.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책을 덮어야 하는 것은 종이책이나 전자책이나 마찬가지라니 슬픈 일이다.

그리고 글자쓰기가 상당한 인내심을 요한다는 점이 스트레스다.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다만 문장 쓰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면 됨) 독서 중에 습관처럼 끄적이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면 킨들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필기나 밑줄이 필요없는 가벼운 책읽기를 하는 이들에게 적당하겠다.

...

아... 킨들 팔아야 하나




[태국] 홀연히 사라진 남자, Jim Thompson by 뭉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 시립미술관이었다. 아시아의 도시들이 겪는 각종 재앙에 대한 기획 - 아시아현대미술프로젝트 CITY-NET ASIA 2011 - 이었는데 방콕관에 들어가니 한쪽 벽면 가득 방콕시내를 그린 지도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심히 살피던 중, 짐 톰슨이라는 글자가 여기저기 적혀있는 걸 알았다. 누굴까? 서양인의 이름이 왜 방콕을 설명하는데 그리 많이 필요했던 것일까?



짐 톰슨(Jim Thompson)은 1948년부터 방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실크회사(Jim Thompson Thai Silk Company)를 설립, 운영했던 미국인이었다. 생전에 예술에 조예가 깊은 탓에 태국의 예술작품들을 수집하며 실크의 매력에 미끄덩 빠져든 그는 사양산업이던 태국 실크산업의 중흥기를 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예술가적 안목때문인지 그가 방콕에 살았던 집과 내부에 전시된 컬렉션을 보기 위해 여전히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유물을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딴 짐 톰슨 아트센터(The Jim Thompson Art Center)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시립미술관 전시도 그 아트센터에서 출품한 작품들이었다.


실크회사를 차리기 전 독특했던 그의 이력도 흥미를 끈다.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이 끝나기 직전에 CIA 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들어가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던 톰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진 공산주의 도미노현상을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에 투입된다. 이곳에서 그는 주로 부패하고 무능하지만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사랑을 받았던 세력의 후견인 역할을 했으나 이내 미국의 야누스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스파이 생활을 은퇴한 그는 파견지였던 태국에 정착해 실크왕이 되기에 이른다.

한때 '동남아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으로 알려진 톰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그가 '동양과 서양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실크라는 동양적인 소재에 서양식 기술을 접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교론’의 핵심이다.

실제로 1950년대 태국의 실크산업은 수공예 수준으로, 서구의 합성섬유와 공장제 기계공업의 출현에 밀리고 있었던 때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방콕 근처의 수공업자들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서양식 염료와 디자인을 가미할 수 있도록 나선이가 톰슨이었다. 그는 서양의 기술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태국 실크를 알리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양국가들을 대상으로 홍보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덕분에 헐리우드 영화 "왕과 나"에 짐톰슨 실크가 사용되기도 했다. 열성적인 홍보활동을 두고 톰슨은 "일종의 비주얼이 두드러진 선교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7년 3월 26일자 기사). 태국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었더라면 행하기 힘든 일종의 '선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진정성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채 사람들은 다른 이슈들로 짐 톰슨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에게 닥친 의문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67년 3월, 자신의 61세 생일이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 놀러간 말레이시아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정글로 걸어들어가 감쪽같이 사라진 그를 두고 호랑이가 물어갔다, CIA 에서 청부살인했다 (그는 은퇴이후 태국에 정착한 이후 상당한 반미성향의 발언을 일삼았다), 라이벌 실크업체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구름처럼 피어났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로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정글로 들어갈 때 평소 복용하는 약도, 즐겨피우던 담배도 숙소에 남기고 사라졌다는 정황으로 보아 그는 작심하고 죽으러 갔거나 아니면 가볍게 산보를 떠났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언론들이 달려들었다. 그가 미국인이었던 만큼 미국 언론도 꽤나 흥미로운 기사를 많이 양산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당수의 언론들이 톰슨의 실종 직후 구성된 수색대를 눈여겨 봤다는 사실이다. 수색대는 특출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말레이시아 말로 orang asli 라 불리우는 숲에 사는 원주민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숲을 근거지로 하여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간 흔적을 잘 찾는 사냥꾼 스타일의 원주민들로 묘사되곤 했다. 그외에 상당수의 심령술사도 동원되었는데 한 신문에 따르면 당시 신과 접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한 말레이시아 청년은 "톰슨이 아직 살아있으며 악령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어 쇠약한 상태"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톰슨이 돌아올 시간까지 예측했다고 한다 (New Straits Times 2004.2.1 기사). 물론 톰슨은 돌아오지 않았고 언론은 동남아시아의 수색 방식에 오리엔탈리즘 렌즈를 들이대며 낄낄거리는 모습이었다. 제3세계의 토착신앙형 사람찾기와 톰슨 생전의 (서양기술)선교인 이미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한 자연인의 죽음이 '희생'으로 격상된 것이다.

톰슨 사후에 언론을 통해 증폭된 미스테리를 적극 이용한 것은 짐톰슨 실크회사였다. 짐톰슨 실크회사가 실크소재를 이용한 인테리어 분야에 진출했을 때 내건 슬로건은 "living with Jim Thompson" 이었다. 짐톰슨의 알려진 인생과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다. 브랜드 전문가인 마이크 머피는 이를 두고 "브랜드는 신화와 이야기로 구성되지요. 짐톰슨의 페르소나에도 그런 아우라가 풍겨요" 라고 말하며 짐톰슨 실크의 판매전략에 창업주의 죽음이 도움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Far Eastern Economic Review 2001년 7월26일자 기사)

짐 톰슨이 정글로 사라지고 반세기가 지났다. 여전히 그의 이름은 - 브랜드로 그리고 자연인의 이름으로 -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그가 살던 집은 싼늘해 지기는 커녕 관광객들의 온기로 가득하다.  그 모든 비결을 굳이 찾아보자면, 서구식 합리주의 사고를 가진 한 사람의 인생이 동양적인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갖은 미스테리와 감상적 추측들에 의해 적당히 버무려지는데서 비롯되는듯 하다.

토요일 새벽 다섯시 반 by 뭉군

"양수가 터졌네요. 입원 들어갈게요"

순간 찌릿한 전율로 잠이 퍼뜩 깼다. 새벽녘 집에서 나설 때에는 설마 아니겠지 싶었는데 이제 분만이라니. 드라마 속에서처럼 배만 볼록한 갸냘픈 여인이 온갖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실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아내가 아침에 바나나 하나 먹고 병원으로 온 것이 안쓰러웠다. 전날 저녁에도 회식하는 남편때문에 혼자 저녁도 제대로 못먹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뉘우치는 마음에 나도 점심을 굶었다.


본격적인 진통은 반나절이 지나고 오후 세시부터 찾아왔다. 고통은 산모의 정신을 반쯤 나가게 하는 것 같았다. 침대에 달린 봉을 연신 쥐어짜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맞이하는데 금방이라도 봉을 녹여버릴 기세였다. 아내는 연신 무통주사를 외쳤지만 주사 투입 후에도 별다른 완화증상은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어서 사력을 다해 힘을 주는 아내. 얼굴의 실핏줄이 하나둘씩 틱틱 터져갔다.


그렇게 산고를 두시간 여 겪은 후 어느 순간 의사가 나를 부른다. 거짓말처럼 율이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가는 생각보다 몸집이 크고 사람같았다. 아가의 울음보다 먼저 내 울음이 터졌다. 고생했다고 다독이자 아내도 그제서야 정신줄을 되찾아 오는 듯 싶었다. 엄마에 이어 아빠 품에 안긴 아가는 아빠 목소리에 눈을 뜨려고 안간힘이었다. 아니, 적어도 아빠에겐 그렇게 보였다. 뭐가 보이지도 않을 신생아였지만 내 유전자가 얼마간 반영된 아이가 내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아내는 출산 직후 두시간만에 평소 상태로 회복하는 신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아이도 아내도 건강하다는 소식에 무엇보다 감사했다. 아직 세상이 낯선 아가는 연신 팔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며 세차게 울어댔다. 자신의 팔다리에 놀란 것이, 아직 자기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출산후 2박3일동안 머물 병실은 안락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그날밤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티비를 볼 생각을 했다. 아가는 잠깐 젖을 물리고 재우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병마에 대처하는 동남아 정치인들의 자세 by 뭉군

세월이 흘러가면 누구나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운명인데 병마가 덮치면 유난히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걸어온 인생의 부침이 클수록 그러한데, 한때 최고권력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일수록 그 뒤안길이 더 쓸쓸해 보인다. 특히나 그가 무소불위의 독재자였을 경우 위축감은 배가 되는 듯하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이제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고 있지만(88세) 올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의 압도적이지 못한 승리로 인해 일말의 압력과 책임감을 느껴 일선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고문총리 (Minister Mentor)라는 직함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전설의 정치인이다. 그런 그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으니 최근 말초신경계 이상증상으로 인해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 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의사인 그의 딸이 이를 공개했으나 그녀는 병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정신상태 만큼은 멀쩡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며 권력누수를 방지하는데 만전을 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음이 턱밑까지 드리웠을 때도 리콴유는 아마 명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싱가포르의 미래를 기획하는 유언을 남길 것이다. 남겨진 여당은 유훈정치를 하며 근근히 지지율을 유지할테고.

[머리도, 옷도 하얗게 변해 진정한 PAP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그]


지난 2008년 리콴유와 긴밀한 사이였던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가 사경을 헤맬 무렵, 리콴유는 친히 자카르타로 날아가 수하르토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리콴유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 30년간 본인과 긴밀하게 협력해온 오랜 친구가 국민들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 그래, (수하르토의 재임기간에) 부정부패는 있었다.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특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그의 통치기간동안) 국가발전과 성장이 있지 않았는가" 

"I feel sad to see a very old friend with whom I had worked closely over the last 30 years, not really getting the honors that he deserves," Lee told journalists for Singapore media after the visit, according to a Channel News Asia report. "Yes, there was corruption. Yes, he gave favors to his family and his friends. But there was real growth and real progress," Lee was quoted as saying.

(기사출처)


리콴유는 병석에 누운 친구의 모습에서 무얼 본 것일까. 병든 사자는 더이상 위험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게 애초에 국민들에게 사자가 되기 보다는 왜 듬직한 코끼리가 되어주지 못했을까만은 리콴유는 나름 진정으로 자신과 같은 권위주의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를 몰라주는 사람들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싱가포르 국민들에게는 죽는 그날까지 흐트러짐없는 엄한 아버지상으로 남기로 한 듯 싶다.  (2008년,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젊은이의 질문에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면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 전 대통령은 리콴유 전 총리에 비하면 젊은 편(66세)이긴 하지만 몸 상태는 더 나빠보인다. 지난 201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하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생명을 이어온 그녀는 최근 뼈에 문제가 있음을 이유로 치료차 국외출국을 시도하다가 공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Former Philippine President Gloria Arroyo at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 in Manila on 15 November 2011

[사진출처]



[사진출처:AP]



후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그녀의 비행을 막아선 것인데 이유는 현재 조사중인 아로요 전 대통령 내외의 각종 부정행위와 비리에 대한 조사 필요성으로 인해 아로요를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로요가 목적지로 잡은 싱가포르가 필리핀과 범죄자 인도협정을 미체결한 국가라서 더욱 의심스럽다는 점을 추가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아키노 대통령이 내린 출국금지조치는 최근 대법원이 '아로요에 대한 출국금지는 무효'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스르고 강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정의의 수호자인 (그러나 상당수가 아로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 결정을 무시한 셈인데,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동의할 만한 조치이긴 하나,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필리핀 정치의 뿌리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일말의 증거라 하겠다. 지난 2001년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으로부터 쫓겨날 때도(아이러니하게도 에스트라다 대통령 탄핵과 후임인 아로요 대통령취임에 앞장선 이가 아키노 대통령의 어머니인 코라존 아키노 전 대통령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의 절차를 거쳤는데, 의회에서 에스트라다 탄핵이 희박해지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힘(피플파워?)으로 탄핵을 성사시킨 바 있다. 

어쨌든 찾아온 병마에 대해 대처하는 리콴유와 아로요의 방식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약간은 마지못해) 인정한 리콴유는 애써 밝히기를, 자신은 거동이 조금 불편한 뿐 여전히 싱가포르를 위해 정신적 사고가 가능하다며 자신의 건재함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정부의 불허가 예상되면서도 공항까지 굳이 찾아갔던 아로요는 휠체어와 뼈 지지대에 몸을 맡긴 채, 화장기없는 퀭한 얼굴로 카메라 세례를 맞이했다.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지나친 긍정과 부정을 보이는 두사람의 전략은 위험하다.

희귀성 뼈 질환이라는 아로요가 휠체어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그녀의 빠른 회복력에 감탄하기 보다는 조소를 날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국민들이 그랬듯이 정치인들의 급작스런 건강변화는 금세 잊혀질 것이다. (mb가 후보시절 한 토론회에서 자신의 병역면제 사유를 밝히는 순간에 헛기침을 연신 내뱉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시덥잖은 사람이구나 했던 기억이...)

리콴유의 건강 이상설을 부정하는 움직임 역시 싱가포르 정치인들이 리콴유 사후의 싱가포르를 차분히 준비하는데 방해요인만 될 것이다. 그가 남아있는 한 그에 기대서 다른 여지는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다시금 느끼지만,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국가원로를 가진 나라는 참말로 부러운 나라다.


동남아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혁명 by 뭉군

오늘 이코노미스트 Banyan 블로그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변화를 다룬 글을 읽었다. 흡사 유럽의 위기와 아랍의 봄에 비견되는 "조용한 혁명"이라고 표현된 "동남아의 변화"는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 (SEA change)"란다.

이코노미스트가 말하는 국가별 조용한 혁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얀마는 군인들이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의회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사뭇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아웅산 수칫 여사가 작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이후 정부의 파트너로 조금씩 인정받고 있으며 삼엄한 언론통제가 어느정도 누그러졌다. 그리고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는 최근 총리가 말레이시아판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law)을 폐지하겠다는 깜짝놀랄 발언을 했다.

태국의 경우 탁신의 지지세력인 빨간 셔츠 세력(the red shirts)이 선거를 통해 탁신의 여동생이 이끈 Pheu Thai 당을 집권여당으로 만들었다. 잉럭 총리는 군부와 군주제의 개혁을 공공연히 약속한 바 있다.

싱가포르 역시 변화의 바람에서 예외가 아니다. 금년 5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승리였긴 했지만) 여당이 받은 득표율은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이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집권여당이 선호한 후보가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사실 더 극적인 변화는 리콴유의 건강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나이탓인지 최근 그의 병환이 속속들이 언론을 타고 흘러나오는 형국이다.)

이러한 변화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정부가 주도하는 탑다운식의 개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의 행동을 추동한 것은 정부를 위협하는 국민의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코노미스트는 상기시킨다. 태국은 탁신의 퇴출 후에 끊임없는 붉은 셔츠의 봉기를 겪어야 했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최근 선거개혁운동인 Berish 2.0이 정부를 곤란하게 한 바 있다. 그리고 미얀마는 2007년 샤프론 항쟁이라는 거센 민주화 운동이 온 세계를 시끄럽게 했었고.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혁명의 기운이 동남아시아에서 넘실대는 것일까?...

 

[베트남]호치민공항에 입국장이 없는 이유 by 뭉군

호치민 Tan Son Nhat 공항.  2007년 12월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재개장한 호치민의 세련된 국제공항이다. 사람 이름을 땄는가 싶어 찾아보니 근처 마을 이름이었다네. Tan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사는 싱가포르에서 살다가서 그런지 (올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출마자가 모두 Tan씨였다) 여전히 공항 어딘가에 탄 모씨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것만 같다. 하긴 호치민 자체가 인명을 이용한 이름이니 외람되게 또다른 인명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 아저씨 호 아저씨 호 아저씨]


이 공항 건물 안에는 입국장(Arrival Hall)이 없다. 문을 열고 건물을 완전히 벗어나야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 친지, 친구 혹은 호텔직원을 만날 수 있는 구조다. 일본 ODA를 받아 지어졌다는 말(일본 정부가 2억여 달러를 들여 리노베이션을 했다고 함)을 들었는데 돈을 아낄 목적이었는지 어쨌는지 화려한 내부시설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출구는 오직 하나]

사실 입국장이 없는 공항은 낯선 나라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들에게 썩 유쾌한 구조는 아니다.  공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 입국자들이야 어디서든 만나서 집이나 호텔로 가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입국장에서 숨고를 새도 없이 대책없이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글바글 길바닥 입국장, 2007년 12월 호치민 공항]


생각해 보면 여느 공항 내부에 위치한 입국장이야 말로 처녀여행자들이 제일 포근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공항 밖에 나서면 이런 저런 삐끼에, 미터기없는 택시에, 온갖 무법이 판을 친다 할 지라도, 적어도 공항 안에서라면 점찍어둔 숙소로 가기 위해 지도를 얻고 이리저리 교통편을 물어도 왠지 모르게 덤태기 안씌우고 객관적으로 가르쳐줄 것 같은 믿음을 주는 곳이 공항 입국장이라는 공간일텐데, 이를 제거한 호치민 공항에 발을 내딛는 여행자들은 문득 준비없이 맞이한 바깥공기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공항의 입국장은 낯선 여행객들이 도착한 나라에 대해 첫인상을 가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 나라 사람들의 생김새나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그림, 사진, 예술품 등 나라의 상징들이 입국장 곳곳에 진열되어 여행자들에게 보여줄 이미지를 만들어 내느라 분주한 곳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상징을 보여줄 수 있는 입국장이라는 공간이 없는 호치민 공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베트남이 아직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방증일 수 있겠다만, 달리 생각해보면 베트남이 입국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화려한 길거리 문화 아니었던가? 이 나라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길거리 음식, 노점, 좌판 (그리고 여기서 벌어지는 흥정), 노천카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호치민공항이 해외여행객들을 위해 입국장에 전시하고픈 상징물도 어쩌면 길거리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모든 것]



박노자 by 뭉군


박노자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이었다. 나는 오슬로대 교환학생이었고 그는 내가 오슬로대를 선택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스무살 언저리로, 누구나 그랬듯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주로 강압적인 위계문화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 만난 그의 글들은 통쾌했다. 그가 사정없이 찌른 우리 사회의 곪은 상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제기한 문제들이었지만, 돌아보니, 박노자가 한국어를 유려하게 구사하는 백인이라는 점이 그의 주장을 더 새롭게 혹은 매력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오슬로에 도착한 이후 호시탐탐 그를 조우할 기회를 노렸지만 그가 나를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하는 모종의 수줍음(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으레 내 혈액형을 묻지)에 그저 조용히 학교와 기숙사를 오갈 무렵, 또다른 교환학생 친구가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 책에 사인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나도 덩달아 흥분하며 그가 수강한다던 "한국 현대사" 과목을 나도 청강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까지 가서 뭔 한국사를 배워!" 라는 타박을 귀국 후에 두고두고 학교 교수님께 들어야 했지만 (그러나 노르웨이 친구들은 정작 나에게 "우리나라에 뭘 배울게 있다고 왔냐"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곤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나에게는 흥분 그 자체였다. 

그는 뭇 선생님들보다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은 따뜻한 유형의 선생님이었다. 나와 친구를 포함해 비록 서너 명의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어서 그런지 (오슬로대에서 한국어 및 한국사 과목의 선호도는 지극히 낮을 무렵이었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겠다만) 가끔 수업이 끝나고 한국학생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기는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서 절대 말을 낮추지 않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수업에 참여를 하며 그리고 간간히 대화를 하며 나는 그가 (물론 국적상 한국인이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이면서도 이방인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항상 김치 냄새가 깊이 배어있었으나 언제나 상대가 누가 되었든 경어를 쓰는 그의 말투에는 한국문화 - 초면에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위계를 확인한 후 말을 놓는 일련의 행위  등 - 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는 있지만 벗어나기 어려운 학연, 지연, 위계, 파벌, 남성우월주의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입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년동안 맺은 사제관계(교수와 청강생도 사제라면 사제겠지)를 통해 나는 그로부터 한국역사 뿐만 아니라 그의 외유내강의 모습에서 한국사회를 살아내는 법에 대해서도 얼마간 학습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학자가 필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한국에 돌아와 교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에 큰 망설임을 비추곤 했는데 그 이유로 한국 대학에 여전히 존재하는 위계와 파벌 등에 대한 거부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사회가 다양한 개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배포를 키울 수 있기를.

개인적으로는 2009년까지 가끔 연락을 드렸는데 (청탁이 조금 끼어있긴 했지만서도...) 이후로 드문드문하다가 끊어져 버렸다. 금년 여름에 회사일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나 싶었는데 그것도 조금 재미난 이유로 무산되었고.

스무살의 내가 완고하게 고집부린 문제들에 대해 어느새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는 지금의 나를 볼 때마다 그의 하이톤 목소리를 다시금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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