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쌀의 자급자족은 불가능한 일인가? by 뭉군

필리핀 친구들은 늘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아무렴 우리보다 밥을 더 좋아할까 싶었는데 마닐라에 머물면서 지켜본 필리핀 사람들의 쌀사랑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음식에도 밥을 곁들여 먹는 놀라운 식단을 가지고 있었다. KFC 치킨에도 밥이 나오고 로컬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인 졸리비(Jolibee)의 스파게티에도 밥을 내오는 것을 보고 정말 밥없이는 못산다는 말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2008년 필리핀에 머물고 있을 무렵, 그곳은 식량위기의 중심에 있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은 저마다 충분한 양의 쌀을 수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에 떨고 있었고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 때, 방글라데시, 카메룬, 이집트 등지에서 시위와 폭동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고의 쌀 수입국인 필리핀의 상황은 더욱 급박했다. 국민들에게 쌀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처럼 보일까 두려운 아로요 대통령과 관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굵직한 조처들을 발표했다. 쌀을 창고에 모아두고 사재기를 도모하는 김삿갓들을 때려잡겠다고 군대를 동원하기도 하고 태국에 가서 필리핀에 쌀을 수출해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하기도 했으며, 국내 시장 쌀값 안정을 위한 보조비를 지급하기도 했다. 

당시 일련의 위기사태를 보며 자연스레 들었던 의문 하나는 왜 필리핀은 쌀을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세계 최고의 쌀수입국가로 남아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농사짓는 것보다 사서 먹는게 더 싼가? 기후상 벼농사는 어려운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필리핀의 유명한 쌀연구소 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는 세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다. 산악지형인데다 국토가 자그마한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 필리핀에서 쌀농사를 지을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둘째, 매년 급증하는 인구를 따라 쌀을 생산할 여력이 없다. 1억이 가까운 인구에 매년 2%씩 증가하는 다산국가인 필리핀에서 이에 걸맞는 경작량을 내놓기란 농업혁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셋째, 인프라의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수로 등 관개시설 정비가 안되어 있으며 쌀을 운반할 도로들이 엉망이라 생산성 증가와 쌀의 원활한 공급을 방해하고 있다.

쌀 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쌀을 자급자족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세번째 이유를 제외한 첫째와 둘째 이유가 거의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요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산아제한이 국가정책으로 가능할 것이나 필리핀 카톨릭 교단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있는 상황인 관계로 신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어려울 듯)



그러나 이에 대해 필리핀의 좌파 정치경제학자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2008년 식량위기 시절에는 태국에 쌀을 팔라고 울고불고 사정하는 처지였다만 1993년까지 해외에 쌀을 수출할 정도의 자급자족에 버금가는 상태였던 필리핀이 쌀을 수입하게 된 데에는 일련의 구조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Walden Bello, 2009, "The Food Wars" 3장)


필리핀이 쌀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에 대해 벨로는 우선 농업분야에 대한 정부의 상대적 무관심을 꼽았다. 1980년대 피플파워에 힘입어 마르코스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잡은 코라손 아키노 정부 시절부터 전임 정부가 남겨둔 엄청난 빚을 갚느라 농업기술 발전을 소홀히 했고 이러한 무관심은 무서운 빚쟁이들을 만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 벨로의 주장이다. 당시 World Bank 등이 채무국인 필리핀에 요구한 구조조정안이 나라경제를 건전하게 하기는 커녕 말아먹는데 일조하고 외려 국가채무를 상환하는데 급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마르코스 정권 말기였던 1982년 7.5%였던 정부 지출 대비 농업투자 비율이 1988년 아키노 정권이 들어선 후 3.3%로 반토막이 나고 비슷한 기간동안 정부지출 대비 국가 채무 이자 상환 비율은 1980년 7%에서 1994년 28%로 급증했다니 농업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분야의 예산도 삭감당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다.  

정부의 투자도 부족했지만 주로 남의 땅에서 쌀을 생산하는 농부들이 대다수인 필리핀의 쌀 생산성도 높지 못했다. 이러한 농업생산성의 저하는 1986년 민주화 이후에도 지지부진했던 토지개혁으로부터 기인했다. 1988년 CARP (Comprehensive Agrarian Reform Program)라는 토지개혁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사실상 지주들의 입김이 많이 반영된 누더기 법안이었다. 민주화의 아이콘이었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자신도 엄청난 땅을 가진 지주의 딸인지라 토지개혁을 화끈하게 추진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결국 토지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2008년 현재 CARP가 목표한 개혁 대상 토지의 불과 17%만이 재분배되었을 뿐이었다. 소작농으로 남은 농부들에게 땀흘린 만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꿈에 가까웠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경작이란 신바람나는 행위가 아닌 그저 굶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벨로가 꼽은 마지막 이유는 무역자유화 바람이다. 정부의 투자 부족으로 농업분야가 힘을 못쓰고 있을 무렵인 1995년, 필리핀은 WTO에 가입한다. 이젠 낮은 관세로 상당수의 농산물을 들여올 수 있게된 것이다. 낮은 관세는 필리핀에 닥칠 두가지 변화를 의미했다. 이는 필리핀 사람들이 외국 농산물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뜻이었으며 정부 입장에선 수입품에 매기는 세금이 적어질 수 있다는 신호였다. 가뜩이나 빚갚느라고 인프라에 투자를 하지 못한 판에 세급수입마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수입량은 늘었지만 이들 품목들로부터 거두는 세금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3년 전체 GDP중 5.6%를 차지했던 관세수입은 2002년 2.8% 수준으로 반토막이 되어 버렸다. 

자유무역이 필리핀에 미친 영향은 수입감소 뿐만이 아니었다. 해외상품들의 자유로운 유입을 허용하기 위해 국내시장의 빗장을 열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도 쌀시장 개방은 유보조항을 두고 있었지만 소량의 수입은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처지였다. 1995년 전체 쌀 소비량의 1%를 수입해야 했으며 2004년까지 4%를 외국으로부터 들여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이렇다할 지원도 받지 못한 국내 쌀시장은 이미 흔들리던 상태였던 터라 WTO가입 이후 필리핀은 할당된 의무수입량보다 더 많은 쌀을 수입하기에 이른다. 국내 수요를 필리핀 내 쌀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했고 수입쌀의 증가로 전반적인 쌀 가격은 더욱 낮아졌으며 농민들도 돈안되는 쌀농사를 접고 도시로,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농민들도 돈이 된다는 밭농사로 갈아타길 주저하지 않았다. 

벨로의 주장은 여러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선 IRRI가 쌀 자급자족이 어렵다고 하며 꼽았던 이유들(국토지형과 인구성장률)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과, 당연한 이야기긴 하지만, 2008년 쌀 수급 위기에서 정부가 국가안보에 쌀이 미치는 영향을 느꼈더라면 이제라도 농촌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관련 정책(토지개혁, 인프라 확충 및 정비)을 펼쳐야 하고 이는 예전처럼 자급자족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벨로는 탁월한 학자인 동시에 정치인이기도 하다. Akbayan 이라는 사민주의 정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다. 우리의 진보신당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당이라 그 시점이 아련하긴 하지만, 정당의 목표가 정권창출인 만큼 악바얀이 성장해 쌀 자급자족의 핵심인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끄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말레이시아] 피시헤드 커리 Fishhead Curry in Johor Bahru by 뭉군

싱가포르에 살 적에, 폴 혹은 탄 롸이 촨이라 불리우는 한 싱가포르 친구는 두어 달에 한번씩 나에게 슬쩍 다가와 JB (Johor Barhu)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오곤 했다. 섬나라 싱가포르와 맞닿아 있는 말레이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조호르 바루 말이다. 

몸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 육체파인 폴은 날마다 먹는 가루분말 약이 싱가포르보다 30% 정도 더 싸다고 말하며 그곳을 찾곤 했다. 난 오메가 쓰리 같은 알약을 몇 개 쟁여두기 위해 가끔 폴과 함께 JB를 가곤 했는데 딱히 살 것이 없더라도 우리가 그곳에 가면 꼭 들르는 카레 생선대가리국 집 때문에 함께 월경하곤 했다.   

말레이시아로 넘어가는 일은 여느 출입국 절차보다 간소했다. 싱가포르의 북쪽 어느 MRT역(이샨인가, 아 가물가물...)에서 노란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국경으로 향한다. 지은 지 얼마 안된 새 건물에 들어가 출입국 절차를 마친다. 여권에 도장 꽝 찍고 출입국 관리소에서 내려오면 바로 그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추가요금없이 다시 탑승한 후 다리를 건너면 말레이시아다. 


비교적 안락한 싱가포르에서 긴장 풀고 살다가 말레이시아로 넘어가면 몸과 마음이 긴장되게 마련이다. 왠지 모르게 지갑이 든 주머니 한번 더 살펴보게 되고 순진한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JB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뭔가 다른 느낌이 도시를 지배한다. 갑자기 노점상들이 질서없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거리의 말레이계의 비율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그리고 아주 귀여운 말레이시아 신호등도 만날 수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Kam Long Restaurant 라는 피시헤드 커리집이 있다. 항상 폴의 잰걸음을 따라가느라 구체적인 위치는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인터넷으로 대충 훑어 보니 다들 정확한 위치를 표현해 내지는 못하더라. 그저 Jalan Wong Ah Fook (Jalan 은 거리라는 뜻)의 길가에 위치한 허름한 음식점이라는 점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다.  

평범한 음식점처럼 보이는 이곳은 항상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맛집이다. 폴과 나는 항상 점심 시간을 한참 빗겨간 3~4시즈음에 도착하는 데도 줄서지 않고 들어간 적이 별로 없었을 정도였다.

 

들어가면 메뉴판을 따로 찾을 일도 없다. 그저 사람 머릿수에 맞게 피시헤드커리 요리가 나올 뿐이다. 뭘 먹어야 할지 혹은 어떻게 주문할지 고민하는 관광객들에겐 일행의 머릿수만큼 손가락으로 표시해 주면 끝. 다만 추가로 음료수 주문은 꼭 해야할 듯 하다. 제대로 된 냉방시설도 없는 열대지방의 길거리 음식점에서 뜨끈한 국요리를 호호 불어먹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게는 에어컨 한 대 들여놓지 않고 문전성시. 음료수를 팔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르고. 


카레에 생선은 언뜻 생각하면 뭔 맛일까 싶은 의문을 자아내지만 실제로 먹어본 사람은 착 달라붙는 자연스런 궁합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가 먹는 카레맛이 아니고 아주 진한 강황분말이 뜨거운 국물에 야채 및 생선과 함께 버무려져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생선살엔 카레가 잘 배어있고 국자로 얼마간의 생선과 야채 그리고 국물을 밥위에 얹으면 밥한그릇쯤 쉽게 비우는 맛이다.  더위와 뜨거움과 약간의 매운 맛때문에 땀이 비오듯 쏟아질테니 콜라 한잔 머금고 바로 다음 국자를 퍼야한다. 아님 앞에 앉은 폴이 다 먹어 버리니까. 


로컬 레스토랑인 만큼 값도 비싼 편은 아니다. 다만 싱달러를 안받아서 조금 문제일 뿐. 최근에 올라온 관련 포스팅을 보니 2인에 18링깃이라고 한다. 7,000원이 조금 안되는 가격. 

2009년 3월 즈음인가, 귀국하기 한 달 전에 마지막으로 JB를 들렀을 때 폴이 피시헤드 커리를 사주며 말했다. "다음 번에 내가 한국갔을 때 니가 한턱 내리라고 기대할게". 여느 싱가포르 친구들처럼 무척이나 실리적인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맛을 선물해 주었구나 딴 롸이 찬. 근데 왜 여적까지 한국엔 안오냐?


  



[세네갈]선거와 낙서 그리고 위대한 정치인 by 뭉군

세네갈에 도착했을 무렵, 이 나라는 대통령 선거 1차전을 끝내고 결선투표를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자동차로 시내에 들어서자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운동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후보자들의 사진들이 곳곳에 나붙어 있고 누구에게 투표하자는 문구, 예를 들면 2012 Votez Wade와 같은 문구들이 벽에 아무런 정성없이 쓰여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Abdoulaye Wade는 2000년 이후 12년째 그 자리를 지키던 중, 정말 마지막이라며(85세라는 그의 나이와 대통령 임기가 7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호소는 진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번째 대통령직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세네갈 인들은 거리시위로 화답했고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치러진 선거에서 와데 대통령은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초라한 득표율로 2위 득표자와 함께 결선 투표를 맞이했다.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강력한 반 와데 전선을 구축하고 있어 그의 집권연장의 꿈은 애초 쉽지 않았다.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은 와데가 재집권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결과를 조작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흘리는 형편이었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 바로 어제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고 예상대로 와데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으며 덕분에 세네갈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제 세네갈 인들에겐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선거의 흔적들을 지워버리는 일만 남게 되었다. 공식 선전물인 벽보나 현수막보다 지우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은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들이다. 혹자는 세네갈의 political graffiti 라고 부르기도 하더만 그래피티라고 하기엔 너무 생각없이 막쓰지 않았나 싶다. 



선거에서 벽보는 주로 후보자의 이름과 기호를 유권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공식적인 수단으로 쓰이는데 반해, 위와 같은 낙서들은 허용되지 않는 지지의 표현이기에 밝은 대낮에 함부로 쓸 수 없고 "어디 컴컴한" 곳에서 써야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눈에 띄는 빈 벽들을 눈여겨 보았다가 어둑해진 시간이 되면 슬쩍 다가가 얼른 선동 문구를 작성하고 빠져나와야 한다니, 묘한 아이러니다. 

다카르 시내에서 본 수많은 낙서 중 내가 머문 호텔방에서 줌을 크게 땡겨 찍은 아래 사진속 낙서는 그 어떤 선동문구보다 마음속에 콕 박혀들었다. "누구를 위해 투표하자"는 1차원적인 지지행위가 아니라 "누구를 지켜주자(Defense ~)"는 다분히 감상적인 말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이후 '주흐날리스트'를 제외한 모든 불어단어를 머리속에서 탈탈 털어내어 버린 탓에, 위 사진을 보고 느낀 비장함은 떳떳한 종류의 것이었다. Defense Duriner 라는 뜻은 "(아마도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이름이라 추정되는) 두리너 후보를 지켜라"라는 뜻일 테고 Amende 3000 이라는 말은 두리너를 지키기 위해선 3,000여 표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와데의 부정선거로 인해 정직한 지도자 두리너가 밀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어느 지지자가 피를 토하며 썼을 것이라 생각에 나는 집에 돌아와 세네갈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 두리너를 검색하게 되었고,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었다.  

아아 두리너는 고작 이런 사람이었던가.

존대의 일상 by 뭉군

"네 ooo 고객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우선 그동안 저희 카드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전화 드린 것은 우수고객님들께만 특별한 혜택을 드리기 위해서 이번 달에 한하여 카드사용 한도를 오백만원으로 상향조정해드리기..."

"얼마요?"

"네 카드사용 한도 오백만원이십니다."

또, 또 쓸 데 없이 말을 올리고 말았다. 아니 이번에는 그나마 이치에 맞는 사물올림이다. 돈을 숭배하는 건 모두가 끄덕이는 일 아닌가? 돈을 벌자면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는데 소중하다 못해 존대까지 하는 내가 바로 그런 류의 선구자 아닌가. 그래도 "예약이 꽉 차셔서요", "이번에 새로 나온 카드가 있으신데요" 라는 말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거봐요"

"네 고객님,말씀하십시오"

흠 뭔가 심상치 않은 고객이다. 급히 고객 응대 매뉴얼을 뒤적인다. 답이 있겠냐마는. 

"아니 나한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카드 사용한도를 높이는게 무슨 혜택이야. 그냥 돈 더 쓰라는거 아니야. 지금 나랑 장난쳐?" 

"고객님 그런 뜻은 아니셨고요, 이번에 카드 사용한도가 높아지신 후 실적이 좋으시면 이자율 할인 들어가신 후 추가적인 혜택으로 이어지시게 됩니다"

매뉴얼에 이르기를 고객이 이성을 잃고 분개할 때는 최대한 존대하며 바짝 엎드리란다. 그땐 사람과 사물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존대하는 나를 보게 된다. 발화자는 물건보다 못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럼 너나 해, 알았냐?"

고객은 몇차례 험한 이야기를 내뱉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기사 애초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돌린 것은 나였으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감정을 홀로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음 고객과의 연결이 기다리고 있다. 난 언제쯤이면 내 자신을 높여 발언하는 날이 올까. 


"마음이 닳고 닳으셔서 이젠 일 못하시겠습니다. 그만 두시겠습니다"

동남아에서 온 딱딱한 소식들, ISEAS Monitor by 뭉군

오랜만에 친구가 구글로 말을 걸어왔다. 반가워서 바쁜 와중에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선물에 넣어 한 달 전에 보냈단다. (배로 보낸 것이냐...)

당시 미국 내 아시아 관련 단체로부터 펀딩을 받아 동남아로 필드웍을 가는 길에 한국에 들린 친구였는데, 경복궁에서 나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진 한 장을 필드웍 결과보고서에 하나 슬쩍 끼워 넣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동남아인지 서울인지 미국 사람들은 모를 거라면서. 아직도 미국 사람들에게 아시아는 그렇게 획일적인 이미지일까.

친구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캐나다 대학에 있는 한 정치학자가 숫자를 쓰지 않고 동남아 정치를 들여다 본다는 정보를 들었고 싱가포르의 동남아연구소(ISEAS)에서 이번에 새로 동남아 소식지를 발간했다는 것도 알았다.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 친구가 준 ISEAS Monitor 2012년 1호를 얼른 펼쳤다. 



동남아 국가들의 주요한 정치 및 사회분야 소식들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소식지였다. 일반 언론만큼 시의성이 있는 주제들이면서 내용은 더 깊고 풍부해 보였다. 한편으로 이코노미스트에서 다루는 아시아 소식들보다 커버하는 국가는 많지만 뭔가 특유의 학자풍의 문체가 곳곳에 배여 안그래도 재미없는 정치 및 사회 소식을 더 지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안습이었다. 돈주고 사긴 아깝지만 (그래서 무료인듯) 주기적으로 동남아 소식을 빠른 시간안에 업데이트 하고자 하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읽으러 가기)

ASEAN Monitor는 Asian Survey 라는 학술지의 요약본 정도를 표방하는 듯 보였다. SSCI라는 학술계의 품질인증 마크를 단 '우수' 학술지로 평가받는 Asian Survey는 두달에 한번씩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경제,사회 소식을 비교적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전달하는데, 내용이 조금 긴 편이라 매번 긴 글을 읽기엔 벅차고 돈주고 보는 것을 아까워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꺼려할 만한 학술지다. (유료지만 최소한 목차는 볼 수 있다) 그런 나같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나름의 틈새를 노린 ASEAN Monitor의 위치선정이 나쁘지 않았다.

지역 전체의 이슈를 먼저 요약해 주고 국가별 소식은 캄보디아부터 시작하는 ASEAN Monitor를 읽으면서 계속 뒷쪽에 있을 싱가포르 소식이 궁금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필진이 과연 싱가포르에선 어떤 소식을 중요하다고 다뤘을지를 알고 싶었다. ASEAN Monitor 를 펴내는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는 싱가포르 정부의 상당한 재정 지원을 받고 있기에 싱크탱크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할 수 있는 물주의 행동에 어떤 기준을 들이댈 수 있을 것인가.

호기심을 꾹꾹 참고 펼쳐본 싱가포르 섹션에서 크게 두가지 이슈가 다뤄졌다. 첫째, 최근 사회를 들썩이게 한 몇가지 사건들이 싱가포르가 가진 "청렴함(non-corruption)",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평판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의 향후 조치를 예상한 대목이 사뭇 비장하다.

"정부는 이러한 논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마 부정부패에 연루된 이들에게 신속하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동요하는) 민심을 다잡으로 할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범법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사법부가 할 일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워낙 사법부와 행정부가 긴밀하게 협조하는 나라니까 그러려니 한다. 싱가포르 정부를 정의의 수호자와 등치시키는 단락을 읽으며 문득 앞서 다른 나라의 정치상황을 분석할 때 표현했던 거침없음은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캄보디아 섹션에선 상원 의회가 거수기(rubber stamp upper house)라는 표현이 있었고 (p2),

인도네시아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로 가지 못하고 사실 퇴화(overall deterioration in earlier democratic achievements)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며(p3),

말레이시아에서는 정부여당이 소유한 미디어와 그 프락치 NGO단체들이 인종과 종교 문제를 건드리며 정국을 혼란케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p4),

미얀마에서는 최근 숨통이 트인 야당이 누리는 정치적 공간이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와 규정들에 의해 다시 제한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이 나왔다 (p5).

사실 위에서 썼던 상당수의 나쁜 어감의 단어들이 싱가포르에도 존재하는 것들 아닌가? 거수기 의회, 민주주의의 퇴화, 정부여당이 소유한 미디어,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와 규정들에 의한 정치적 공간의 제한...

그러나 싱가포르의 두번째 소식은 첫번째보다 더 찌라시 수준이다. 싱가포르의 주요 야당인 노동자 당(Workers' Party)의 한 국회의원이 당내 기혼여성 당직자와 바람이 나서 당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예상되는 재선거에 따른 정치적 파장을 분석했는데, 솔직히 좀 악의적인 분석 아닌가? 싱가포르 소식 말미에 살짝 언급한 "2011년 총선에서 야당이 올린 혁혁한 성과(strong showing in the general election last year)"에 대한 원인 분석이나 현황에 대한 분석이 더 흥미있는 소식이 아닐런지.

참고로 Asian Survey의 2012년 2월호 게재내용 중 싱가포르를 다룬 논문의 초록은 아래와 같다. 

"2011년 싱가포르 인들은 의회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대안보도와 커멘터리가 중심이 된 소셜네트워크 미디어가 정치적인 열기를 생성하고 대중 사이에서 반정부적 흐름을 결집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강력한 반정부적 흐름에 부딪친 정부여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사상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이게 싱가포르에서 벌어지는 진정 중요한 소식 아닌감?



 



세네갈 신호등 - 아담한 보행 by 뭉군

세네갈 다카르 시내에 들어설 무렵 눈에 불을 켰다. 나에게는 찍을 것이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시내 곳곳에 불켜진 신호등이 상당히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다만 신호등 싸인의 의미나 명령에 개의치 않는 거리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줄기차게 점멸하는 신호등이 약간 무색해 보였을 뿐.

신호등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계획은 여의치 않았다. 차 안에서 찍자니 옆에 앉은 아저씨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고 호텔에서 짐을 풀고 나와서 찍자니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사실 무엇보다 나를 말렸던 것은 길거리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흑형들의 눈빛이었다. 이렇게 많은 흑형들은 처음인데다, 군시절 그리고 유럽여행 중 만난 흑형들에게 받은 트라우마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통신사를 갈아타라는 전화를 받고 물벼락을 맞은 듯 다시 잠들지 못했다. 어제는 (정말 나름 부르르 용기를 내어) 아침 일찍 호텔을 빠져나와 근처의 독립광장을 찍었으니 오늘은 이 나라의 신호등을 담을 차례다. 사실 세네갈의 치안은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듣긴 했지만 어쩐지 불안하다고 느끼는 지역에 오면 현지 신호등을 찍는 일이 더욱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현지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대상을 향해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사람들에게 "나는 좀 이상한 관광객입니다"를 널리 외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동이 트기 전 호텔방을 나섰다. 트렁크에 담긴 옷들 중 가장 칙칙해 보이는 잠바때기를 걸치고 정복을 갖춰 입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호텔 정문을 통과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이 나라엔 뭔 아침형 인간들이 이리도 많은 것인지 차라리 해뜨고 밝아지면 나올 것을 하며 가슴을 쳤지만 다시 들어간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미리 점찍어둔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신호등을 찾아갔다. 죄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휘익 둘러보고 디카를 꺼내 얼른 신호등을 찍었다. 주변이 어두웠지만 플래시를 터뜨릴 깜냥이 내겐 없었다. 손이 발발 떨려 다시 조준해야 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결국 조악한 사진 한 장만이 카메라 메모리에 저장되었다. 낮에 보면 아담하고 낮은 높이에 달린 조촐한 보행자의 모습을 그려낸 신호등이건만, 남은 유일한 사진 한 장엔 그날 새벽녘의 가쁜 숨소리가 신호등 불빛에 번져 남았다.  




행복한 나라 by 뭉군

문득 문득 행복하다고 트윗하는 강풀을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던가.

자유를 외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에 대하여 (미국/Freedom Plaza) by 뭉군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잡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워싱턴 디씨점령을 위해 진을 친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프리덤 플라자(Freedom Plaza)였다. 확인해 보니 역시나 그들은 워싱턴 시내의 맥퍼슨 스퀘어(McPherson Square)와 프리덤 플라자 두 곳에서 천막농성 및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고, 급기야 얼마 전에는 정부로부터 퇴거명령을 받기도 했단다. 퇴출이유는 공공장소에서 숙박이 금지되어있다는 공원규칙과 기생충을 부르는 인간의 배설물을 소지하고 있는 점이라고 한다. 비폭력이긴 하지만 '점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체제의 전복을 시도하는 시위자들에게 이리도 시덥지 않은 이유를 들이대다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올 뿐이다. (여긴 국가보안법 뭐 이런거 없나) 어쩌면 시위를 애써 축소하기 위해 내놓은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Occupy DC 시위자들은 지난 1월부터 텐트를 치고 이곳 프리덤 플라자에서 겨울을 났다고 하는데 문득 재작년 11월 연신 옷깃을 여며가며 느낀 그곳의 냉기가 느껴져 왔다. 그 썰렁했던 공간을 녹일 만한 열기가 가득하다는 이곳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들은 무얼 위해 미국의 수도를 점령할 생각을 했을까.

"여기 모인 사람들의 생각이나 방향은 모두 다릅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공통점이라면 이 나라가 기업의 지배에 종속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점입니다." (발언출처: NYT 기사)

[사진출처 / 이들의 더 자세한 주장은 여기서 확인가능]


프리덤 플라자는 애초 웨스턴 플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지만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근처 호텔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했던 것을 기념해 이름을 프리덤 플라자로 바꿔달았다.


이름에 걸맞게 여러 종류의 자유를 갈구하는 숱한 이들이 프리덤 플라자를 메워왔는데 이곳을 시위장소로 삼은 이유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플라자에 서면 저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일 정도로 근거리인데다 백악관도 불과 세 블럭 떨어진 곳에 위치한 터라 언론의 관심을 쉽게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인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미국 특파원들도 플라자 근처에서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카메라 리포팅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찍힌 시위자들의 천막은 체제에 대한 도전과 불만이라는 상징을 그 어떤 구호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프리덤 플라자의 노숙전사들/사진출처]

이들은 단순히 언론에 멋진 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하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도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직선으로 이어주는 도로인 펜실베니아 에비뉴 상에 프리덤 플라자가 위치한 까닭에 정치인들은 이곳을 쉽게 지나다닐 것이다. 게다가 플라자 바로 앞에 마주한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은 미국의 모든 대통령들이 재임기간중 빠지지 않고 이곳을 들러 공연을 관람했다는 사실로 유명한 곳이다.

[프리덤 플라자 코앞의 국립극장]

무엇보다 프리덤 플라자가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워싱턴 중심가에 빼곡히 들어찬 비싼 건물들 사이에 시민들이 발붙일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공간을 통해 시민들은 발언권을 획득하는 한편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우리 시민들이 헌법에 정해진 의사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누릴 뿐인데 왜 우리를 억누르려 하는가? (우리가 이러는 동안) 온갖 로비스트들과 대기업들은 이 광장 주변의 건물들을 차지하고서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발언출처:Occupy Freedom Plaza 웹사이트]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의 말은 이 광장의 정치적 쓰임새를 잘 드러낸다. 온갖 로비스트들과 함께 당당히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시민의 움직임에 프리덤 플라자가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리덤 플라자 바닥에 적힌 글귀: 국민의 주권...]


그런 의미에서 광장에서 벌어지는 집회는 온갖 이익단체의 로비가 그러하듯이, 비폭력적이고 금전적인 제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구속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사유지에서 시위를 벌였다면 땅주인이 우리를 쫓아낼 권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린 공공장소에 있어요. 우리는 이 공간을 존중하며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소통하고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거죠."[발언출처 상동]


광장에서 다들 그렇게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 ISEAS by 뭉군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을 연구하고 싶어요" 
나는 대선 출정하는 여느 정치인들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지도교수는 침착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석사시절에 무슨 큰 연구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Literature review나 잘하고 오늘부터 ISEAS 가서 필리핀신문을 좀 뒤져보세요"

그렇게 해서 다음날부터 출근하게 된 곳이 ISEAS(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였다. 싱가포르국립대 캠퍼스 내에서도 약간 구석진 곳에 위치한 탓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2년간의 싱가포르 생활중 그때가 처음이었다. 1968년 정부 주도로 설립된 이래 동남아연구로 이름 좀 들어봤다싶은 학자들이 머물며 연구했던 곳이었지만 딱히 갈 일은 없었던 까닭이다. 

연구소는 생각만큼 으리으리했다. 단독연구소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 잉어들을 비롯한 선굵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정원을 지나 본관으로 가니 카운터가 보인다. 다가가 간단히 내 신분과 이용목적을 밝히고 시설에 대한 이용을 신청했다. 까다롭진 않았지만 그들은 연구소를 이용하는 댓가로 내 석사 졸업논문이 완성되면 연구소에 한 부를 기증할 것을 요구했다. 나야 영광이지. 누가 내 졸고를 읽어 주겠나만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까먹고는 아직도 기증을 못하고 있다)

당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3개월이었다. 그 기간동안 필리핀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문인 Philippine Daily Inquirer 의 20년치 기록을 훑어보는 목표를 세웠다. 피플파워의 스멜이 조금씩 풍겼던 1983년부터 내 연구주제인 필리핀 부재자 투표법(Overseas Voting Act)이 통과되었던 2003년까지가 그 대상이었다. 


매일같이 하루종일 카운터 앞자리에 위치한 마이크로 필름 리더기 앞에 앉아서 주구장창 필름을 돌렸다. 마이크로 필름을 뒤지는 탓에 검색어로 원하는 기사를 찾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하루치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리다가 내가 노리는 단어들이 나오면 해당기사를 복사하는 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 노가다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필리핀 사회에 대해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지도교수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당시 필리핀 20년을 들여다보며 남겼던 내 노트엔 몇가지 인상적인 사항이 저장되어 있다. 

- 섬나라의 불리한 통신여건 때문인지 전국 일간지에 각종 시험 합격자 발표 
        (특히 사법시험에 대한 관심도 아주 높다)
- 값싼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가 (죽은 사람 시체 사진에 실리고 "slain" 이라는 단어가 빈번)
- 뭔 선거개표를 일주일 넘게 하나 
- UP(필리핀국립대) 신입생 명단까지 신문에 게재될 정도로 UP가 선망의 대상이고나 (94/Apr/2)
- 성경구절이 매일 신문에 수록되는 나라
- 미스 유니버스에 대한 과도한 관심 (카톨릭 나라와 온갖 야한 사진이 판치는 신문이라)
- 매년 초 폭죽놀이로 여러사람 사상


이처럼 필리핀에 대한 깨알같은 지식도 얻게 되고 논문에 상당히 도움이 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하긴 했지만 불과 한달후에 필리핀 아테네오대학(Ateneo de Manila University) 리잘(Rizal) 도서관에 방문한 나는 내 미련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곳에는 Philippine Daily Inquirer 의 모든 내용이 전산화되어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삼개월이 걸린 닭짓이 리잘 도서관 귀퉁이에 앉아서 사흘이면 끝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니. 그래도 유의미한 닭짓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ISEAS 에서 머문 3개월은 석사과정의 말미라 수업도 없고 친한 친구들도 싱가포르를 떠난 시절이었다. 그나마 대학원생 방에 가야 밥먹을 친구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ISEAS 가 다른 건물들과 워낙 멀리 떨어져 위치한 탓에 그것마저 귀찮아진 나는 석달동안 점심시간을 살짝 비켜간 시간에 주위 캔틴이나 레스토랑을 이용하곤 했다. 연구소 바로 옆건물 레스토랑은 꽤나 저렴한 가격에 이런저런 음식을 팔았었는데 호커스톨의 일상 음식들에 넌더리가 난 탓에 별미라면 별미였다. 

오늘 ISEAS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우연히 발견한 Global Think Tank Ranking Global_Think_Tank_Ranking.pdf이라는 자료때문이었다. 전세계 싱크탱크 기관들의 지명도, 정부 정책에의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매긴 랭킹인데 (별별 순위를 다 매기는 구나) 여기서 ISEAS 는 아시아 지역 21위에 올랐다. 다른 싱가포르 싱크탱크 세 곳이 높은 순위에 올라있어 딱히 좋은 순위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이름이라 적어본다. 

오후의 프리랜서 by 뭉군

오늘도 여행가방을 쌌다. 이렇게 아무때나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프리랜서라고 부른다. 자유롭게 시간조절을 해가며 쉴 수 있지 않느냐는 흰소리가 그 바탕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오후 두시의 지하철 객실에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는지 묻는다.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되는 이들의 얼굴에서 프리랜서의 자유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일없는 사람들, 방학맞은 대학생들, 외근나가는 직장인들의 눈빛은 출퇴근시간대 서로의 몸뚱이에 눌려 지친 직장인들의 그것보다 더 흐리고 초점을 잃은 모습이다. 왜일까. 쏟아지는 졸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빠르게 주변을 휘이 둘러 분위기를 먼저 살폈다. 이 칸에도 역시 끈적하게 늘어진 분위기다. 그 와중에 작달만한 한 남자가 구걸도 아니고 위압적인 눈빛을 달고 다니면서 칸칸의 부녀자들에게 적선을 요구한다.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니 씨바 여긴 그지 깽깽이 밖에 안탔어"

그가 물러가자 사람들은 희미하게 웃는다. 똥은 그저 더러울 뿐이니까.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이 칸에서 제일 활기만발한 남자다. 그러나 내가 일구는 사연들마저 그저 유쾌하게 들려서는 안된다. 시중에 나가면 이만오천원에 살 수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천원짜리 두장만 받고 파는 이유는 뭔가 그럴듯 하면서도 절절해야 한다. 백화점에 납품을 하던 중소기업이 부도가 났다거나 판로가 막혔다는 식의 예상치 못한 외부적 파고를 언급해야 한은 물론이다. 요즘은 애프터서비스도 기본이다. 되든 안되든 제품 껍데기에 공칠공 번호 하나는 남겨둬야 한다.

그러나 이미 구걸 난봉꾼이 한차례 휘젓고 간 까닭인지 객실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톤을 좀 높였다. 드디어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안내말씀 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없이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파시는 분께서는 지금 바로 하차해 주십시오."

나는 이 칸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짐짓 모른 척 딴청이다. 그러나 아이폰으로 신문을 읽던 청년의 눈동자는 더이상 굴러가지 않았고 수다를 떨던 아줌마의 입은 계속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다시 여행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다보니 문득 신세 한탄이다.

"안한다 안한다... 또 어떤 할 일없는 놈들이 전화했는 모양이구나...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전화를 하고 그래"

사람들은 나를 잡상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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